새해에는 다시 살아나기를[동아광장/최인아]

 코로나-주거 불안-진영 갈등으로
내리막길만 보이는 어지러운 세밑
꽃 피우긴 힘들어도 지는 건 한순간
앞서간 이들 노력과 우리의 저력 믿을 때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의 시 중에 ‘선운사에서’가 있다. 그중 한 구절을 옮겨 적는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연인과 헤어진 후의 감상인가 싶지만 어디 사랑과 이별만 그럴까. 세상 이치 모두가 그렇다. 외국어를 익히는 데는 수고가 길지만 잊는 건 금세이고 다이어트의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살이 찌는 건 한순간이다. 연인이 아닌 사람들 간의 관계도 뜻을 맞춰 합을 이루는 길은 지난하나 서로의 필요가 어긋나 돌아서는 것은 일순간이다. 원수가 되거나 헌 옷 내다버리듯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우리는 한 점에서 만나고 빠르게 흩어진다. 차곡차곡 쌓는 건 오래 걸려도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 기업도 매한가지다. 몇몇 이들이 모여 의기투합 끝에 회사를 세운다. 죽음의 시간을 견디고 타이밍도 잘 만나 안정세에 접어들고 성장을 이어간다.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도 다지고 어느 날엔가는 시장 지배자 위치에도 오른다. 하지만 큰 파도 앞에서도 끄떡없을 것 같은 탄탄한 조직도 삐끗하면 한순간에 내려간다. 리더가 바뀌고 엄한 데를 바라보며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으면 조직은 안에서부터 곪기 시작하고 게다가 부지런히 수고해야 열매를 얻는 게 아니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정직하게 애쓰지 않는다. 이런 조직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눈치 빠른 자들은 벗어날 궁리를 하고 하선을 준비한다.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가꿔 올린 성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쌓아 올리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에 났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삼월이로 불리며 아씨의 시중을 들고 그 아씨가 시집가 노비로 같이 따라가 마님을 모셨을까? 아님 양가댁 규수로 나고 자라 하늘 같은 지아비를 모시며 효부로 살았을까? 이 생각을 하면 한편으론 아찔하고 또 한편으론 감사하다. 불과 100여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만 해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문제도 많다. 당면한 코로나 극복뿐 아니라 저출산과 불평등, 일자리 감소와 주거 불안정, 노사 갈등과 진영 갈등…. 문제를 꼽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길을 찾아낼 거라고 희망을 품어 본다.


 한때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회자한 적이 있다. 다시 묻자. 긍정의 힘은 어디서 오나? 스스로를 믿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과거를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고 돌파해낸 과거를 믿는 것이다. 국민 엄마라 불리는 연기 경력 수십 년의 어느 여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랬다. “지금도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러면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전에도 내가 해냈잖아’라는 마음이 올라오면서 다시 자신감이 생긴다”라고.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100만 부 넘게 팔렸다. 직장에서 받는 차별과 불평등, 경력 단절과 독박 육아 등 여전히 열악한 여성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여성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82년생’ 여성 후배들 다수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해하고 분노한 것이다. 그녀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그래도 지금이 30년 전보다 훨씬 나아진 거라고. 아, 오해하지 마시라. 조용히 만족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만큼 되기까지 앞서 겪은 사람들, 선배들의 노력이 있었으니 미래의 후배들이 지금보다 나은 시간을 보내려면 당신들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열심히 하라는 얘기다. 

어디를 봐도 내려가는 길만 보이는 어지러운 세밑이다. 특히 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넘쳐나는 진영 갈등을 보고 있자면 이러다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건 아닌지 한숨이 나오고 걱정이 깊어진다. 어렵게 이룬 것들을 모두 잃고 내려가는 길로 떠밀릴까 두려워진다. 내려가는 길은 어디에나 있고 가파르며 한순간이니 말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먼저 살다간 수많은 ‘우리들’이 애쓴 덕에 지금 우리가 있다. 앞선 이들의 노력과 시도가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어느 여배우처럼 ‘우리는 해냈잖아’ 하고 다시금 우리들의 저력을 믿어 본다. 우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새해엔 다시 살아나기를, 다시 올라가기를 소망한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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