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밍둥촌의 윤동주 생가.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중국 만주 지역을 답사하던 중에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을 찾았다.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 시내 인근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윤동주 묘를 둘러보았다. 새삼 윤동주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지난해 여름 일본 규슈(九州)를 방문했을 때, 한 한일관계사 전문가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형무소가 아닌 규슈제국대학(현 규슈대) 의대 실험실에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사망했다는 말이 나돈다”고 필자에게 귀띔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1943년 일제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된 후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거기서 마루타(생체실험 대상자)로 지목됐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감성이 섬세한 스물여덟 살 시인은 정체 모를 실험실로 끌려가 동물처럼 학대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의 일이다. 
그의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윤동주의 생가가 자리한 밍둥(明東)촌이 있었다. 룽징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벽촌이다. 장백산맥에서 분기한 산들이 멀리서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터였다. 마을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윤동주의 집터는 그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100여 수의 시를 새긴 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윤동주는 ‘별의 시인(星的 詩人)’으로 유명했다.
윤동주 생가는 그의 시처럼 아름답고도 고아(古雅)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1985년 작고)는 큰 기와지붕에 솟을대문, 깊고 깊은 우물, 여러 과실수 등을 갖춘 집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었다. 만주에서 재현된 조선의 전형적인 부잣집 풍광이었다.
윤동주 생가는 풍수적으로도 훌륭한 ‘복(福) 명당’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안채에 서려 있는 지기(地氣)가 훌륭했다. 1900년 윤동주의 조부(윤하현)가 이 터에 자리를 잡은 후 커다란 부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윤동주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1932년 윤동주의 아버지가 자식 교육을 위해 시내(龍井)로 이사 간 후 여기서 세를 살았던 16가구 역시 모두 부자가 됐다. 당시에도 명당이라고 소문이 났다.” 
밍둥촌 촌장을 지낸 조선족 송길연 씨(64)의 증언이다. 송 씨는 윤동주 생가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을 주렁봉이라고 했다. 복(福)이 주렁주렁 열린 산이라는 뜻일 게다. 송 씨는 또 “마을 이름인 명동(明東)의 ‘東’ 자는 동쪽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선을 밝게 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선의 미래를 밝혀줄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인물 명당’ 소문은 일제에도 흘러들어갔다. 송 씨는 일본 사람들이 밍둥촌의 지맥(地脈)을 끊기 위해 여기저기에 쇠막대를 박았다는 얘기를 마을 어른들로부터 듣고 자랐다. 


필자는 윤동주 생가에 이어 룽징 시내로 이사 간 곳까지 찾아보았다. 두 집터를 비교해 본 결과 ‘양택(陽宅·집)은 음택(陰宅·무덤) 못지않게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풍수고전 ‘황제택경’의 글귀가 실감났다.

윤동주가 15세 때 룽징 시내로 가지 않고 밍둥촌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는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동포들의 아픔을 달래는 ‘영혼의 치료사’로서 평안하고도 복된 삶을 누렸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윤동주 생가는 그런 기운을 충분히 줄 수 있는 명당인 것이다. 반면 윤동주가 룽징 시내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며 살았다고 추정되는 집터는 일본에서의 그의 불행한 삶을 암시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집터 군데군데에 좋지 않은 땅 기운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길흉(吉凶)을 겪은 윤동주의 삶과 그가 살았던 터에서 필자는 양택 풍수의 명암을 진하게 체험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