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로서 수필보기와 맥혈기(脈穴氣)로써 수필쓰기 / 박양근

 

 

열면서

수필은 가까이하기에 먼 당신인가. 아니면 멀어도 내 님인가. 그 어느 것이든 수필은 얻기도 어렵고 지켜나가기도 힘들다. 그러한 수필쓰기는 즐거우면서도 고되고,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창작이다. 당연히 수필은 내게 무엇인가라는 노력의 땀을 필요로 한다.

수필을 배우기 전에는 예사로 생각하여 용을 부리지 않고 하다못해 막 힘도 쓰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쓰이는 것을 술술 풀린다고 여기며 그럴싸한 소재가 떠오르면 몇 편이고 우려먹는다. 문장을 가다듬고 치밀한 구조로 엮고 영혼을 불어넣으라는 주문보다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답다는 속설을 추종한다. 나아가 “참 좋다”는 주변의 덕담을 그런가하고 믿게 된다.

그런데 수필을 쓸수록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수필이 어느 순간에 “머나먼 당신”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준 높은 작품 앞에서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위축감에 빠지고 연륜이 쌓일수록 개헤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수필의 팩트인 “P․E․N”이론과 수필의 “문자도”를 이해하고 6안(현미경, 망원경, 프리즘, 쌍안경, 돋보기, 잠망경, 심안)과 4성(주제, 소재, 구성, 문장)을 습득하면 바라는 글 판이 짜인다. 수필이 서서히 “곁의 남자(여자)”가 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논자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점은 3가지다. 우선 수필은 네오타임캡슐이라는 사실, 수필쓰기는 상상의 의미망 짜기라는 점, 수필은 맥(脈)과 혈(穴)과 기(氣)로 이루어진 제2의 인체라는 점이다. 이 3가지는 수필은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생성의 미학, 수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진화의 미학, 그리고 수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라는 본질의 미학을 이룬다.

이런 접근법을 택한 이유는 수필은 체험의 리얼리즘이라는 기본론을 옹호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수필론을 수립하여 창작에 실제 적용할 수 있기 위해서다. 소위 수필창작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론1: 신화를 담은 타임캡슐

21세기의 수필은 네오 타임캡슐이다.

수필은 시적이고 소설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절제의 언어이므로 시적이고, 서사적이므로 소설적이고, 인간의 삶을 담아내므로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현장감이 넘치면서 인간의 철학과 우주에 대한 답을 펼치는 말하기는 무엇인가. 신화다. 그러면 삶에 대하여 부단하게 질문을 던지고 근원적인 의미를 찾아 사유하고 우주의 신호를 포착하며 사회의 진화를 풀어내는 문학은 무엇인가. 수필이다.

그런데 문학의 생명은 탈시간에 있다. 탈시간이란 불멸의 저장성을 말한다. 이집트의 나일 강이든 뉴욕의 월가든 아프리카의 밀림마을이든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예전에는 신화에, 다음에는 문학에, 요즈음에는 타임캡슐과 PC에 저장된다. 타임캡슐이라는 기록상자 속에는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거니와 의식주, 정치구조, 유희, 예술과 스포츠, 미담과 범죄, 그리고 자연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 등이 보관된다. 즉 타임캡슐은 개인과 사회, 과거와 미래를 엮는 사고(史庫)이자 신시대의 신화집(神話集)인 셈이다.

인간은 누구인가. 오늘의 인간은 전근대주의 시대의 인간형과 달리 사이보그라는 합성인간이다. 지성이 담겨있어야 할 머리에는 전자회로를, 감성이 넘쳐야할 가슴에는 PC 스크린을, 옆 사람의 손을 잡아야할 손으로는 마우스를 쥐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글을 쓰는 인간은 사이보그이면서 스핑크스이다. 독일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역사는 스핑크스다.”라고 갈파했을 때 역사란 시대의 해석이며 스핑크스는 그 해석자이다.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사람에게 물어 답을 맞히지 못하면 사람을 죽여 버렸는데 오이디푸스(Oedipus)가 ‘인간’이라는 답을 푸는 순간, 스핑크스는 신화적 괴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수필가도 스핑크스처럼 인간의 실존과 역사에 대해 묻는다. 다만 질문이 자신에게 향하므로 대답을 찾지 못하면 스스로 ‘죽임’을 겪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다.

이렇듯이 수필은 탐색구조에서는 신화를, 탈 시간적 저장성에서는 타임캡슐을, 독자와의 소통성에서는 PC 역할을 한다. 현대 생활인의 생존원리는 “More click, Better life.” 로서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할수록 삶의 질량은 증가한다. “더 빨리, 더 자주, 더 일찍이” 에 맞추어 컴퓨터를 두드리는 행위는 현대 노마드인의 생활이 신화시대로 환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24시간 떠나지 않는 컴퓨터 마우스이고 그 저장소인 타임캡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임캡슐로서 현대적 글쓰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에세이와 수필과 칼럼이다. 에세이는 18세기의 이성주의와 정기간행물의 발간에 힘입어 사회 문화를 다루는 산문으로 발전하였으며 전문적이고 아카데믹한 문체로 학구적이거나 사회적 이슈를 철학적으로 풀이하여 독자에게 지적요구를 만족시켜주고 있다. 1930년대부터 시민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 발전한 칼럼은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가장 촉망받는 미래 산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칼럼은 서평, 특집기사, 논평, 인터뷰, 대담 등의 형식으로 음식, 스포츠 의상, 의학, 여행, 주택, 금전 등에 대하여 전문적 지식과 저널리즘의 안목을 가진 칼럼니스트가 주로 다룬다.

반면에 수필은 논리적 수사학을 바탕으로 하는 에세이나 선정적인 저널리즘에 치중한 칼럼과 달리 상상과 미적 구조를 요구한다. 픽션은 문학이고 논픽션은 실용문이다 하고 말하거나, 수필은 서정적이고 에세이와 칼럼은 논리적이라고 단정한다면 21세기 산문에 대한 인식은 무지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한국의 수필은 양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칼럼과 IT시대의 에세이로부터 이중의 위협을 받고 있다. 서구적 에세이나 칼럼이 갈수록 수필화 되고 있다. “촌철살인”을 무기로 삼았던 칼럼은 짧은 문장과 전문 지식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문화칼럼으로 변모하면서 수필의 경계를 넘어오고 있다. 서구적 에세이도 분량이 짧아지고 개인의 삶에 사회현상을 투입시키는 방식으로 수필의 무드와 어조를 차용하고 있다.

이 짧은 산문들은 인간의 일상을 핵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호 경쟁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짧은 글쓰기”라는 영역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타성적 기법과 자기과시에 머문 수필은 외부의 공세에 대처할 수 없고 차세대독자층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수필가의 경쟁자는 문우가 아니라 시인수필가 소설가수필가와 전문직수필가이며 멀리는 칼럼니스트와 에세이스트이다. 오늘의 산문가들은 신노마드 시대의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독자로부터 ‘안 읽는다’는 수모를 받고 있다. 다양한 산문형식의 타임캡슐이 출현하고 있음에도 한국수필은 서정성과 체험성과 회고적 문체에 빠져 독자가 읽지 않는 “라벤더 향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21세기의 독자가 요구하는 흡인력과 속도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독자와 동떨어진 목가적 복기에 머물거나 전통에 치중한 나머지 모던한 이슈와 비전제시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미를 잃어가고 있다. 수필가들이 유념할 점은 재미의 본뜻을 곡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재미는 우스개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에 대한 희열이다. 이런 것을 구비하지 못하는 글은 수필의 미적구조와 내적 의미망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화적 속성과 미적구조라는 예술성을 어떻게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수필에는 엄연히 등급이 매겨진다.

1차원은 신변이나 신체를 친구나 이웃에게 담담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진지성을 말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누락하면 진솔하지 못하고 헤픈 넋두리가 되기 쉽다. 작가는 일상의 다양성, 수용의 다양성, 인식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자아를 발전시켜야 한다. ‘내가 하니까 개성’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으니까’ 개성이라는 색깔로 서술하여야 자조와 자성과 자각의 삼각 구조가 이루어진다. 수필을 인생학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원은 지적 생산성을 지닌 수필을 말한다. 묵은 지식이나 피상적 개념으로 짜깁기한 글은 인상미(Impression)와 표현미(Expression‎)가 부족하다. 경험을 체화하더라도 수필은 신선한 지성, 객관, 논리를 지녀야 한다. 수필은 아는 것만큼 쓴다고 하듯이 참신한 생각거리가 내재되어야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3차원은 의미망으로 짜여야 한다. 의미망은 짜깁기한 지식이나 덧끼워진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의 근원을 파고드는 감수성과 분별력으로 이루어진 사유공간을 말한다. 대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우주의 근원과 삶의 문제를 꿰어낼 때 수필문은 신화의 좌표에 들어가게 된다.

4차원은 적절한 미적구조를 구축하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작품의 요건인 사색, 감성, 표현력을 함께 엮는 글쓰기(Writing) 단계를 넘을 때 비로소 수필이 예술작품으로 완성된다. 서 말의 한약재를 달여 한 그릇의 탕약을 만드는 과정을 곱새겨볼 시간이 이때다.

고백의 진지성, 지적 생산성, 의미망, 미적구조를 조합하려면 수필적 삶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라는 방향성이 바람직하다. 야생초를 제대로 보려면 허리를 굽혀 시선을 낮춰야 하고 바위나 잔디밭에 누워 우러러본 하늘이 더 없이 숭엄하다. 바닥에 떨어진 밥풀을 묵상의 초인으로 본 적이 있는가. 컴퓨터 문자판을 천자문으로 읽은 적이 있는가. 이렇듯이 작고 보잘 것 없고 버려지고 묻힌 대상이 숨겨온 미덕을 전해주는 신화 이야기꾼이 수필가이다. 그 경지에 다다르면 삶과 우주를 묶는 담론인 수필이라는 타임캡슐에 신화성과 역사성이 담겨지게 된다.

본론2 : 상상을 상상하며

노드롭 프라이는 일찍이『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력이란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있음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베이컨은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영국의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 1672∼1719)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릿속에서 심상을 만들어가며,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상상력이 ‘경험을 토대로’ 한다 함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의미하고, ‘있음직한 본보기를 구성하는 힘’이라 함은 ‘우리가 살고 싶은 이상 세계’의 제안을 뜻하며 “새로운 심상을 형성한다” 함은 현실의 이상화라는 변증법적 상상이다. “새롭게”라는 뜻은 작가적 눈으로 대상을 새롭게 풀이하여 체험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기능이며 과학과 문화와 예술을 진보시킨 동력에 해당한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서 대상과 접촉하지만 우주에는 오감이 포착하기 힘든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상상이 모색하는 대상은 우리의 몸 안에 숨어있거나, 오감의 지평 너머에 있거나, 인류가 꿈꾸는 피안의 세계일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우주일 수도 있다. 그 각각의 세계로 영혼을 안내하는 것이 상상이라는 기운이다. 상상력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다. 세 질문은 모두 대상에서 출발하며 동시에 기하학적으로 서로 연결된다.

(1) 대상에 대한 사색

첫째는 대상이 지닌 근원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다. 이를테면 “무엇?”이다. 오감이 포착할 수 없는 미지(未知) 그 자체로서 사랑의 근원, 미움의 근원, 존재의 근원, 아름다움의 근원, 갈등의 근원, 죽음의 근원 등이다. 이를테면 “새(鳥)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새가 어디로 날아가며 어떻게 비상하는가 하는 연속적인 궁금증과 질문을 말한다. 나아가 나무와 풀의 씨앗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고 왜 흙과 만나야 하고 바람에 실려 떠나야하는가. 이리하여 모든 생물의 근원인 알(卵)과 태(胎)가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질문까지 이어지게 된다.

강돈묵의 「옥수숫대」 를 인용해본다. 이 글은 옥수숫대의 종말에 대한 명상을 보여주며 도달점은 죽음이다. 작가는 시각이미지, 청각이미지, 촉각이미지가 가득한 상상을 통해 겨울바람에 노출된 옥수숫대를 모든 기운을 다 쏟아버린 후에 비바람을 견디는 늙은 가장과 성자와 수행자로 발전시켜간다.

옥수수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다시 읽기를 하면 충격적인 인식의 세계와 만난다. 옥수수에서 나타난 삶의 과정이 모든 대상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강돈묵의 옥수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살다가 죽은 존재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작가는 옥수수를 안테나로 삼아 생멸이란 무엇인가라는 우주의 답을 교신 받으려 한다. 이러한 체험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는 점에서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주에 대한 사유

두 번째 질문은 우주를 향한다. 제재가 우주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원심력이 실린 질문이다. 우주는 대상 하나 하나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대상은 역으로 우주와 관련을 맺으므로 작가는 제재를 통해 우주의 전모를 이해하게 된다. “왜 촛불의 빛은 사방으로 뻗는가?”라는 질문에서 밝음과 어둠, 열과 촛농, 태양과 후광, 별빛과 북극의 오로라 등이 광(光)과 열(熱)의 일부이고, 동시에 우주의 일부이면서 독자적인 존재라는 점을 밝혀야한다.

상상력으로 대상과 우주 전체를 연결시켜 질문을 던지는 두 번째 예로는 김용옥의「수련」을 들 수 있다. 백련을 “물 위에 내려앉은 선녀”, “합장한 소녀의 손”, “일생일대의 찬연한 개화”라는 답이 이어내듯이 무심히 피어난 연꽃에서 우주의 생명과 생태계의 기운을 감지한다. 옥수숫대가 안테나로서 우주와 교신한다면 김용옥의 연꽃은 형상에서는 기도 모습을, 이미지에서는 관음보살을, 영성에서는 부처님의 우주의 신비로운 변화를 인간계에 전파하는 천체망원경의 구실을 한다. 진지한 작가라면 일생동안 우주의 근원에 관한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대상을 찾아야한다. 현재 살아가는 우리 수필가가 탐구하여야할 질문거리가 여전히, 어딘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지 않은가.

(3)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세 번째 질문의 대상은 선택한 제재를 매체로 인간 세계를 향해 던지는 구심적 질문으로서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이 제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다 보면, 작가는 어느새 대상과 우주와 인간이 거대한 동심원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새의 울음은 내겐 뭔가, 촛불의 빛이 내게 무엇을 비추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내재화하는 독특한 인식 방법과 안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은 대상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단계이다. 탁월한 상상으로 사물과 전체 우주를 향한 투시가 가능하더라도 인간의 삶과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상상의 효과는 반감된다. 소재의 존재가치는 삶에 대한 의미를 주고받을 때 완성되므로 상상력은 우주의 신화와 작가의 일화를 연결하는 쌍안경의 역할을 한다.

근래 발표한 정목일의「함박눈」은 덕유산에서 목도한 순백의 함박눈을 무혈혁명으로 인식하면서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겨울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백설의 혁명에 복종하는 풍경을 표현한 의인법과 이미지가 교차하는 상상 속에서 작가는 겨울눈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변화상을 그려내고 자신이 어떤 삶의 단계에 다다랐는가를 계속 자문한다. 이로써 사회의 정치적 문제점을 투시하는 화자는 시각이 아니라 영감으로 “정복자는 진정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다다른다. 고요와 순결과 선정으로 세상을 평등하게 다스리는 함박눈에 스스로 귀의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자연회귀를 체험하게 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애와 복종을 군불, 함지박, 고구마, 김치 무 한 조각, 담배연기, 토끼 사냥 같은 다감한 삶의 소재로 마무리한다.

수필은 “세상 새롭게 읽기”라는 해석 과정이다. 이것에 다다르려면 다양한 안목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물의 미세한 특징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현미경 같은 눈과, 소재가 지니는 근원적 의미를 찾아내는 망원경과 같은 눈, 소재의 색깔, 냄새, 모양, 어원,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프리즘과 같은 눈, 소재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살피는 잠망경과 같은 눈, 선악, 미추의 이분법을 조화시키는 쌍안경과 같은 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심안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문학적 주제가 싹트고 철학적 상상이 가동되면서 시간을 초월하는 타임캡슐 같은 수필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육안(六眼)이 상상을 작동시키는 톱니바퀴라 하겠다.

본론3: 수필의 맥혈기

클릭 1: 수필의 맥

우주와 지구와 인체와 수필을 기하학적으로 조합하면 어떻게 되는가. 수필을 중심으로 4개의 동심원이 만들어진다. 가장 안쪽에는 수필이 자리하며 그 밖에는 인간이, 그 밖에는 지구가 자리하고 제일 바깥에는 우주라는 원이 자리한다. 이러한 동심원은 상호 원심력과 같기 때문에 구심력과 떨어 질 수 없는 궤도를 선회한다. 그렇더라도 수필의 내적구조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이처럼 수필문의 맥은 서두와 전개와 결미로 구성된다. 서두는 주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두뇌에 해당하며 몸통이 음식을 소화하고 숨을 내쉬고 배설하는 오장육부로 구성되듯이 글의 전개부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체험을 연출하는 장에 해당한다. 주제와 소재가 결합하고 경험에 대한 설명과 느낌이 교차하면서 작가의 지적, 정적, 의지적 세계가 구현된다. 오장육부가 건강하여야 몸이 건실하듯이 수필의 충실도는 전개부의 미적 구조에 좌우되며 대체적으로 3개의 내용 군으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내용군은 2∼4개의 소단락을 거느린다. 꼿꼿한 다리가 몸을 제대로 받쳐주듯이 탄탄한 결미는 내용의 요약, 비전제시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수필의 여운미를 결정한다.

이러한 3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에서 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기본 맥에 해당한다.

①서두 단락 (1)

②서두와 전개부의 연결단락(1)

③전개부

ⓐ제1 내용군(3)

ⓑ제2 내용군(3)

ⓒ제3 내용군(3)

④전개와 결미의 연결단락(1)

⑤결미단락(1)

1) 단락 간의 연결성

수필문의 기본 단위인 단락은 척추 마디와 같다. 수필의 본문을 기능별로 구분하면 내용을 전달하는 내용단락과 단락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단락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서두에서 본문으로 넘어갈 때와, 본문에서 결미로 넘어갈 때의 연결단락이 연골처럼 제 구실을 하여야 물처럼 흐르는 문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단락 간의 연결성이라고 부른다.

수필의 문학성은 격조 높은 언술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체험이 감동적이고 구성이 탄탄하여도 표현이 저급하면 작품은 평가절하 되기 쉽다. 반대로 언술에 격이 갖추어지면 부끄러운 약점, 잘못된 실수, 숨기고 싶은 결점을 표현하여도 글은 진정성이 유지된다. 서사적 구성력과 신선하고 유연한 문장이 주제를 살려낸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은 수필로 도약하게 된다.

2) 주제․제재와 문맥의 상관성

주제와 소재가 문맥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글이 달라진다. 작가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소재의 범위를 좁히고 주제를 접목시켜야한다. 서두에서 암시된 주제는 전개부에서 소재를 통하여 확장되고 결미에서 재강조 된다. 여러 개의 주제와 소재가 집합적으로 연결되는 전개부에서 소재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길거나 주제가 소재와 어긋나면 문맥은 산만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필은 한정된 소재를 선택하여 다층적,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외적 특성, 내적 본질, 역사적 의의, 다른 사물과의 상관관계, 작가 자신의 체험과의 상관성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수필의 소재는 수평적으로 펼쳐지면서 수직적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초조감으로 주제와 상관없는 에피소드나, 상식화된 정보, 백과사전지식 등을 삽입하면 글의 맥이 비만증후군에 걸려 내용이 탈선하게 된다. 문맥은 주제와 제재는 문맥이라는 동심원을 이루는 XY축이므로 중심 제재를 기준으로 여러 소재가 동심원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면 수필가는 소재와 주제의 상관성을 찾아내는 중매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형식과 전개의 다양성

글의 전개부는 작가의 내공을 보여주는 무대이다. 주제를 구체화하는 전개부에서는 서술, 설명, 묘사, 예시, 사유, 논증, 분석, 질문, 비교 등의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더불어 내용에 맞게 문장의 장단을 조절하고, 소통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강건체, 우유체, 만연체 등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만일 서정수필이라면 분위기 조성-일화-묘사-분위기 조성-일화소개-묘사의 연쇄구조를 지니고, 설리수필이면 명제제시-예시-논증 -요약이고, 생활수필이면 일화제시- 설명- 일화제시-설명-사유-주제 순으로 짜인다. 문맥은 서정, 서사라는 하부장르에 따라 달라지지만 단락이 서로 이완되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는 일은 조각가의 작업처럼 철심을 박아 맥을 세운 다음에 빚고 깎는 퇴고의 작업이 따른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좋은 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틀을 엮어내는 노련미가 미적구조를 만들어간다. 수필의 맥을 세우는 노력이 선행한 후에 감동과 공감의 혈을 잡고, 문학성을 높이는 맥을 세우면 일층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처럼 “수필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

클릭2: 수필의 혈과 결속 이론

반듯한 글이 되려면 글의 맥이 필요하듯이 감동, 공감, 충격, 인식,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혈이 있어야 제대로 산 수필이 된다. 인체의 혈이 뼈와 뼈, 근육과 근육, 뼈와 근육, 장기와 혈관, 혈관과 림프를 잇는다면 수필의 혈도 작가의 체험과 사유, 인생관과 자연관, 시공의식, 독자의식과 작가의식이 서로 모이는 지점이 된다. 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는 부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부분, 머리가 띵해지는 곳, 억눌린 웃음을 터드리는 순간이 혈에 해당한다. 그런 접점이 없는 글은 허접스레한 수사법으로 엮인 경우가 태반이다. 멋스럽게 읽혀지지만 감동과 공감이 없는 글은 혈이 없음이요, 글을 부지런히 쓰는데도 한 편의 좋은 글도 건지지 못함은 혈을 의식하지 않은 결과이다.

1) 형상과 인식의 결속

인식은 형상에 대한 반응이다. 인식은 형상으로 존재하는 무엇을 읽는 능력이며 비가시적 관념을 가시화하거나 사물을 새롭게 보도록 한다. 형상만 중요시한 수필은 복사 기능에 그친 것이므로 대상의 근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집요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무엇?”에 해당한다. 인식은 오감이 포착할 수 없는 미지(未知)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서 사랑의 근원, 미움의 근원, 죽음의 근원, 탄생의 근원 등을 묻는다. 그러므로 형상이 지닌 원형을 찾기 위해 부단하게 “무엇인가? 아냐, 그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야?”라고 자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사찰 대웅전의 지붕에 우뚝 솟은 망새기와를 상목수로 여기거나, 연못의 백련 봉오리를 우주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로 간주하거나, 바닥에 떨어진 흰 밥풀을 수도승으로 바라보는 것은 망새와 목수, 연꽃 봉오리와 마이크, 식탁에 오롯하게 놓인 밥풀과 벌판에 선 수도자의 원형적 일치를 인식한 결과이다.

이처럼 형상과 인식이 결속하면 무지와 무관심에 묻힌 진실이 드러나므로 의미화한 고급수필을 쓸 수 있다. 문학의 결속이 과학의 인과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현상과 상상의 결속

수필문은 외적 현상과 내적 상상을 합쳐야 한다. “그래서”라는 접속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다. 이를테면 현상은 창작 동기가 사랑의 갈증인가, 미움의 분출인가, 호기심의 발로인가 등이며, 상상은 그 갈등을 해소하는 미적 노력에 해당한다. 밖에서 본 것(outer-watching)을 내적으로 자각(inner-recognizing)하여 현상과 상상 간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도하다.

예를 들면 봄비가 내리면서 달팽이가 사랑을 하고, 겨울눈이 내리면서 아버지가 덮어주던 담요 한 장의 따스함이 생각나는 것이 현상과 상상의 결속에 해당한다. 최민자는「나비의 꿈」이라는 수필에서 나비를 “자유혼, 정착을 거부하는 보헤미안, 바쁠 것 없는 한량, 우울을 모르는 신사”로 상상하는데 나비를 본 시각이 상상으로 승화되어 나비를 곤충이 아니라 풍류와 사랑의 행위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유의 혼이라는 담론에 다다르게 된다.

현상과 상상의 결속하는 차이가 심미적 층위를 만든다. 나비를 양봉업자의 눈으로 보는가. 미혼녀의 눈으로 보는가. 무용가의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글의 좌표가 달라지는 이유는 현상과 상상이 결속하는 양상이 작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3) 내용과 표현의 결속

수필은 내용과 표현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짜이는데 표현은 내용과 조응하여야 한다. 어휘, 수식, 문장은 별개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무늬를 그려내는 부분집합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 흐르는 기가 서로 만나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좋은 수필의 조건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에 이루어져야할 결속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설원의 노루와 농장의 노루는 환경이 다르므로 운명이 달라진다. 눈 쌓인 벌판에서 먹이를 찾아 해매는 어미 노루가 생존을 위협받는 모성을 그려낸다면 밤새워 마을로 찾아온 수노루는 남자의 귀가를 상징한다. 글의 내용은 눈 속의 노루에 대한 묘사이지만 헤매는가, 찾아오는가 라는 내용에 따라 절망인가, 고독인가라는 주제화가 달라진다.

표현은 “왜”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왜 하필 설원의 암노루인가. 왜 강바람을 맞고 선 솔인가. 왜 겨울철 옥수수인가. 그 공통점은 겨울은 죽음과 절망과 견인의 시간이라는데 있다. 우주의 모든 원소는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어 일단 내용을 선택하면 그것에 적합한 표현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내용과 표현이 동일한 결속망에 걸려있는 까닭이다.

4) 주제와 제재의 결속

주제를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절한 소재를 찾아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수필쓰기에서 제재와 주제의 만남은 짝짓기와 같다. 창작은 목적성 언술이므로 좋은 수필은 좋은 제재와 좋은 주제가 만나는 일제일재(一題一材)의 원리에 맞추어 주제와 소재 간의 거리가 최대한 좁혀진 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재와 작가 간의 영적 동일시가 필요한데 수필가는 주제에서는 지적 일치성을, 소재에서는 정적 일치성을 이룰 필요가 있다.

오창익의 대표작「북창」을 살펴보면 제재인 북창은 북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는 물상이며, 목성균의「명태」는 아버지의 꼿꼿한 선비다운 품성을 반영하며, 윤재천의「구름카페」는 작가의 문학적 꿈과 서구적 문학관을 상징하는 구조물에 해당한다.

주제와 제재의 결속을 위한 질문은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특정 주제에 몰두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우주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특정 대상과 만남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들면 “새처럼 울고 싶다”라는 내적 주문은 그렇다면 “그 새를 겨울 눈발에 두자”라는 제재로 연결된다. 이것은 어떤 제재도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수필적 특성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5) 서사와 서정의 결속

수필에서 서사와 서정의 결속은 필수적이다. 서사는 설명으로 서정은 묘사로써 나타나는데 서사적 기법인 해설, 설명, 논증 등이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서정적 기법인 직유, 은유, 이미지, 반어, 역설 등은 심미적 효과를 높여준다. 서사와 서정은 “어떻게”에 대한 방법론으로써 단락 내에서도 설명과 묘사가 균형을 이루어야 서사와 서정의 질적 안배가 이루어진다. 묘사가 뒤따르지 못한 글은 설명이나 보고문에 그치며 반대로 수사가 남용되면 감상적인 미문이 되어버린다.

가령 구활의「아버지의 초상화 그리고 어머니」를 예로 들면 어머니는 “장터에 볼일 보러 나간 아버지가 참외가게에서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어머니가 지나가시는데 아는 체”를 하지 않고, “화가 난 어머니는 간 갈치 대신 참외 한 아름을 사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작아작 씹어 먹는 데모”를 벌였다는 내용은 설명과 묘사, 서사와 서정이 결속한 좋은 예에 속한다. 서사와 서정의 배합에서 보면, 장터에서 아내를 못 본 척 하는 남편과 앙갚음하는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남성중심과 페미니즘의 교차가 노란 참외라는 서정에 집중된 것이다. 좋은 수필은 서정미를 바탕으로 산문정신을 구축하여야 한다는 예이기도 하다.

'수필에서 혈은 글을 죽이거나 살리는 부분이다. 사지가 멀쩡하다고 산 사람이 아니듯이 감동과 공감, 기막힌 인식과 순수의 정조가 없는 글은 독자에게 “손해 봤다”는 반응을 준다. 문장 전체에 혈을 깔려고 하지 말고 한번만이라고 웃게 하고, 무릎을 치게 하고, 시선을 멈추게 하면 독자에게 “본전 찾은” 글로 평가받는다. 그 단계가 되면 “급(級)에서 단(段)”으로 승단하여 수필 도반에 속할 수 있다.

클릭3: 수필의 기(氣) 흘리기

사람은 골격과 오장육부가 갖추어지더라도 기가 없으면 식물인간에 불과하다. 기는 산 수필을 만드는 심미적 에너지다. 기를 흘려보낸다는 말은 감수성과 심미감을 생산하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에 식물인간과 약골과 장골이 있다면 문장에도 죽은 글과 산 글이 있다. 그 구체적인 실현방식은 앞서 설명한 상상외에 환상, 연상, 착상, 발상 등이 있다.

1) 수필과 환상

환상은 로맨스가 갖는 팽창과 과장의 미학을 지향한다.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때로는 환상적인 꿈을 펼쳐내는데, 환상은 신비적이며 이국적인 정취와 탐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갖는다. 흔히 수필적 환상의 예로서 찰스 램의「꿈속의 아이들」을 드는데 찰스 램은 아이가 없음에도 환상적 꿈을 빌어 아이와 함께 있는 듯 한 분위기를 끌고 가다가 결미에서 그 환상을 깨뜨린다. 그의 경우처럼 작가에게 잠재된 욕망과 무의식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환상은 상상과 차이를 보여준다,

한의원 침구실에서 여승과 나란히 침을 맞은 때를 그려낸 안병태의「여승」속의 수필화자는 성애적 환상으로 빠져드는데 그 원초적 본능을 통해 성(性)과 성(聖)을 결속시킨다. “빨쪽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드러난 뽀얀 맨발”을 바라보는 화자는 “발가락에다 주홍빛 꽃물을 들여 주고 싶은 누이”를 떠올린다. 이처럼 그의 환상이라는 영토에서는 종교적 나르시시즘과 세속적 에로티시즘과 유년기의 노스탤지어라는 서로 다른 코드가 결합한다. 수필의 환상이 소설의 허구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수필과 연상

연상은 사물이 지닌 의미를 확장하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정신작용이다. 연상은 일반화에 의한 연상, 추상화에 의한 연상, 유사성에 의한 연상, 인접성에 의한 연상으로 구분되는데 일반화는 단풍으로 가을을 떠올리는 것이며, 추상화는 다이아몬드 모양에서 야구장을 떠올리고, 유사는 달에서 운전대를 생각하고, 인접은 고향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꽃이라도 땅에 심으면 번식을 연상하고, 꽃을 뿌리면 장례식을 연상하고, 꽃을 바치면 구애를 연상하듯 사물과 행위 간의 관계가 차별화된다.

연상의 예로서 최원현의「저녁노을」을 들기로 한다. 이 작품의 제재인 쌀독에 넣어둔 “빛깔조차 잃어버린” 장도감은 “할머니의 사랑의 맛”으로, 다시 “서산마루에 위태롭게 걸린 노을”로 발전해간다. 홍시, 할머니, 노을은 모두 오래되고 늙고 저물어 있다. 쌀독의 붉은 홍시는 할머니의 온화한 사랑을, 노을의 붉은 빛은 할머니의 노쇠함을 나타냄으로 오늘의 노을은 작가의 나이 먹은 세월을 연상시켜주게 된다.

「저녁노을」은 붉은색에 대한 연상과 작가의 어린 시절이 결합된 예로서 홍시는 “생의 노을”이라는 우주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마이크가 된다.

3) 수필과 착상

착상은 “아! 그것 글감이 되겠네”라는 작가와 소재간의 만남이다. 현현을 일깨우므로 착상의 여운이 오래갈수록 좋은 작품을 만든다. 글의 밑바닥에 착상이 있는가 없는가가 매우 중요하므로 수필가는 늘 참신한 글감을 찾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컴퓨터자판기를 천자문으로 바라보고 설원의 전봇대를 격리된 등대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신선한 착상에 해당한다. 정진권 수필가는「귀를 후비며」라는 수필에서 귀를 후비다가 부러진 성냥개비를 창밖으로 내던지는 순간, “가려운 데까지 닿지 않는다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게 된 성냥개비”를 타박한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평소 인간의 이기심에 대하여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가 부러진 성냥개비에 붙으면서 「귀를 후비며」라는 한 편의 글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착상이 “나는 행동 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반응에 해당한다.

4) 수필과 발상

발상은 인습적인 영상(These)을 버리고 새로운 상(Antitheses)과 새로운 기호(signal)를 만들어 형식적 파괴를 꾀한다. 문학 소통에는 하드코드(hard code)와 소프트코드(soft code)가 있는데 전자는 형식의 변이에, 후자는 내용의 진화에 적용된다. 근래 퓨전수필이 두드러지는 배경도 IT시대의 감성적 영상미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면 대사로 펼쳐내는 극적 수필, 그림과 글이 만나는 수화(隨畵)산문, 칼럼과 에세이가 합친 산문, 동물을 수필화자를 삼는 의인화수필, 죽은 자와 산자의 담론수필은 모두 남다른 발상의 결과라 하겠다.

본인의 졸작「화왕산 억새」는 “핀다. 자란다. 흔들린다. 탄다. 죽는다. 다시 핀다”라는 여섯 문장을 반복시켜 24절후, 12계절을 나타내게 하고 개체의 죽음과 종족적 번식이라는 주제를 접목시킨 담수필로 만들어 보았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종(種)은 무한하다는 발상을 억새밭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작가에게 상상, 환상, 연상, 착상, 발상은 맥과 혈을 잇는 신경망과 같다. 작품의 미학적 지평을 확장하는 기(氣)는 작품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뿐만 아니라, 작가의 인식력과 내공을 결정한다.

뒤퐁은 “문(文)은 인(人)이다”라고 하였고 하이데거는 “문장은 존재를 드러내는 집”, 김진섭은 “자기를 말하는 것은 문장”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말은 수필의 맥혈기(脈穴氣)의 상관성을 지적한 말이다. 인체의 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를 곧게 세우는 축이고 혈은 신체의 운기가 상호 교차하는 지점이며 기는 몸에 흐르는 기운에 해당한다. 문맥이 곧지 않으면 내용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고 혈이 제 자리에 위치하지 않으면 감동과 인식과 충격을 줄 수 없으며 기가 흐르지 않은 수필은 감수성과 미적생명을 잃게 된다. 손가락에 조그만 가시가 찔려도 온몸이 날카로운 고통과 아픔으로 반응하는 인체공학을 상상해보라. 수필의 연결회로도 그러하다.

닫으며

수필가는 상상이라는 농기구로 글밭을 가는 농부에 비유된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을, 철학은 이성을,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였듯이 수필도 인간성과 자연성과 우주성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품격과 등급이 좌우된다. 작품의 질적 차이는 수필적 삶이 뻗친 다변성에 좌우되므로 진정한 수필가는 수필을 문학으로, 다시 문화로, 나아가 신화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미적 에너지를 활활 태우는 이야기꾼(匠人)이어야한다. 일상을 신화화한 타임캡슐에 넣을 만한 수필이 문학적 생명을 갖게 된다.

수필가에는 4계층이 있다. 첫째가 잡문수필가(Scribbler)로서 현시욕(現示慾)을 얻기 위하여 가벼운 다작을 한다. 둘째는 저자수필가(author)로서 빨리 한 권의 수필집을 발간하여 서권력(書卷力)을 얻으려 한다. 셋째는 작가수필가(writer)로서 한 편마다 최선을 다하여 작품을 완성하면서 문자향(文字香)을 꿈꾼다. 네 번째 수필가는 쓰는 수필을 마지막 작품으로 여기면서 예술혼의 극점을 추구한다. 그런 수필가는 예술수필가(Artist Essayist)로서 작품 자체보다 예영기(藝靈氣)라는 영감과 맥혈기라는 서기를 얻으려한다.

고로, 21세기에 유효한 수필을 쓰려면 점성가와 같은 명상과 점술가의 영감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살피고 자연과 소통하여야한다. 앞서 이야기한 육안(六眼)으로 천상계와 지상계와 인간계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주의 담론인 신화와 수필이 얼마나 닮은 가를 이해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에 빛을 보는 타임캡슐에 담을만한 수필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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