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인의 격(格)

 

                           윤모촌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수필론을 대해 왔고, 좋은 수필이 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에 따라서 좋은 수필이 지니는 품격에 대해서도 상당한 안목을 지니게 되었고, 그런 수필을 써내기에 힘써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필문단에 필자가 나서서 고언을 하려 하는 것이 주제넘다 하겠으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감히 나선 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필을 쓰는 사람의 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 온 까닭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을 허는 일이 되어 꺼려온 때문인데, 이러한 풍토가 이제는 방관만 해서는 아니 될 지경에 와 있어 감히 열언코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후진을 위해서 간과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우선 수필인의 격이란 무엇인가부터 보자. 사람뿐이 아니라 가공된 모든 물체엔 격이 따른다. 격이란 주위 환경이나 사정에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분수와 품위라는 말에 유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격이 낮다고 한다면 천격(賤格)이란 말이 되고, 그것은 모욕적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몇 가지 유형의 낮은 격의 수필을 통해 천격의 수필인임을 스스로가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은 자유롭되 불문율(不文律)의 사회적 규범에 묶여 산다. 하지만 불문율이라 해도 그 규범에서 벗어난다면 스스로가 천격임을 못 면한다. 이런 현상이 지금 문단에 염치도 예양도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같은 현상에 필자는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 수필인의 격 낮은 사례를 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과공은 비례 ─ 아첨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도 인간의 아첨은 있어 왔다. 아첨을 개인의 성향으로 돌리면 얘기할 거리는 더 없지만, 이것이 공개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는 문필의 경우가 되면 개인의 일로 머물지 않는다. 아첨이란, 남의 마음에 들려고 간사와 요사를 부려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리는 것이라 하였다. 천격이란 뜻이다. 이 아첨은 사석에서 당사자끼리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밖으로까지 공개할 것이 못되는 부도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첨이 부도덕하다는 것은 아첨으로 떠받들리는 자가 더 잘 아는 일일 터인데, 그리하여 깨우쳐야 할 일인데, 오히려 암 그래야지 하고 ‘에헴’ 하는 식이어서 후진의 인격을 그르친다. 독자들은 실체적 핵심도 없는 말을 한다 하겠으나, 구체적 사례를 들어본다.

 

한 수필가가 수필로, 강사에게 고맙다며 떠받들었는데, 좀 과장을 한다면 기절초풍할 내용이다. 지면 곳곳에 강사의 실명(實名)을 내세우면서 추켜세웠다. 이같이 지나친 공경은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비위가 좋아도 이런 글은 더 읽어 나가기가 힘들어 필자는 이 글을 보고 수필계에 병이 단단히 들어가는구나 하였다. 그리고 그런 아첨에 떠받들려 천하를 얻은 듯이 오만 무치해진 자에 동정이 갔다. 제자에게 문필과 인격이 아닌 아첨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수필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이것은 드러내서 말할 거리가 못 되지만, 언제부터 누가 아첨하는 글로 떠받들고 떠받들리라고 했던가.

 

수필에서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더러 볼 때가 있으나, 이런 것은 아무나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거명되는 인물이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자신의 스승이라 해서 내세우지만, 독자에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두 사람 다 같이 멸시의 대상이 될 뿐이다.

 

실명을 들어 써야 하는 글이 따로 있다. 이른바 회갑, 고희 기념 문집 등에 써주는 글이다. 여기에는 주인공의 장점만을 쓰고 더러는 과장하면서 추켜세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런 글의 본질이 그런 것임을 아는 까닭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기념 문집 속에 있을 때만이 그렇고, 이것을 떼어내 별도의 수필집이나 다른 지면에 옮겨놓으면 그 글은 아첨한 글로 변신한다. 기념 문집에 넣는 글은 좋은 점만을 쓰되, 그것이 아첨이 되지 않게 품위 있게 써야 한다.

 

2. 오만 무치한 자존망대(自尊妄大)

사람은 저마다 자존심으로 산다. 그런데 수필인에게 이것이 지나치면 오만 무치와 자존망대로 빠져 그것이 자신의 불명예인지를 모른다. 이런 격의 수필인은 반드시 독선적이고 그 주변에는 아첨이 꼬여든다. 그리고 아부하지 않는 자는 무참하게 배척한다. 이 아첨과 오만 무치는 필연적으로 야합해서 그것이 자승(自乘)되면서 이성을 잃는다. 그리하여 글 장난질을 하고, 속문도 명문이라 내세워 야합을 한다. 그러면서 제 자랑의 방법도 노회(老獪)하다.

 

이처럼 독재자의 카리스마적 마술에 걸려 속문을 쓴 자가 깨어나질 못하게 한다. 이같은 자의 오만한 유형의 글 한 가지를 상상해 보기로 한다. 호(號)는 살아 있는 사람이 서로 부르기 좋게 자신이나 친구 또는 윗사람이 지어주는 것이고, 거꾸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그것도 죽은 후에 지어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인데 백두(白頭)인 자기 선조의 비석을 세우고, 그리고 행적을 거짓으로 새긴다. 없던 호까지 지어 붙인다. 그러면서 해명하기를, 지금의 자신이 명문가가 됐으니 이쯤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않느냐 했다 하자. 사실이 이런 유형의 글을 썼다면, 이 오만 앞에 할 말이 없다. 후진들이 따를가 걱정된다.

 

3. 제 자랑과 문학비

고향이 낳은 문인을 위해 선후배, 친지, 제자들이 문학비를 세우니 비용을 기탁하라는 광고문을 지면에서 보았다. 그 광고 지면을 보는 순간 주인공이 언제 세상을 떴던가 하였다. 그랬으나 건재하였다.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살아 있는 자가 제 손으로 공적비를 세우는 시대. 죽은 사람에게 세워주는 것으로 만 알았던 내가 멍청이인지 모른다. 삼문문사(三文文士)가 제 손으로 명문가라고 내세우는 세태. 그런데 저 잘나서 하는 제 자랑을 왜 팔불출이라 했는가.

 

팔불출의 첫째 조목이 제 자랑이다. 하지만 제 자랑은 남이 해야 자랑이 되는 것이고, 제가 하면 팔불출이다. 팔불출이라도 좋다는 듯이 얼굴 가죽이 두꺼워져 가는 세태. 그러므로 팔불출이 팔출세(八出世)가 돼가는 문필가의 모습 앞에서, 나는 숨소리만이라도 크게 내보자고 해 본다.

 

한 편의 수필 끝에 약력이 나열되는 것을 본다. 그것이 본문을 읽는 것보다 흥미가 더한데, 한 페이지의 반 가깝게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무슨 회사 간부에서부터 새마을운동 무슨 부장, 무슨 교회 무슨 단체 간부등… 있는 대로 내세운 이 제 자랑을 나도 힘이 못미처 못했지, 한때 그런 것을 부러워했다.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글 쓰는 사람이면 글 쓰는 일과 관련 있는 것이 내세울 거리다.

 

당선 소감도 그러하다. 이제 수필가가 됐으니 수필에 대한 각오와 다짐보다 남편이(아내가) 어떻게 해서 고맙다느니 하고 공개한다. 이런 것은 사적으로 사석에서 할 말이고 지면에 공개할 것이 아니다. 지도 강사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밝혀 고맙다 하는 것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