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꿈 / 유병근

 

 

시는 때로 발 빠른 바람이고자 한다. 숨 가눔 새 없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로 파생되는 새로운 이미지의 물결이고자 한다. 시는 때로 가스 불에 펄펄 끊는 전골냄비이고자 한다. 은근한 모닥불 요리의 감칠맛에도 입맛 다시는 숟가락이고자 한다. 때로는 따끈하고 또 때로는 구수한 된장찌개이고자 한다.

 

첫날밤 신부의 옷을 벗기듯 시인은 시적 대상의 옷을 벗긴다. 그 떨림과 설렘으로 시는 출렁임을 갖는다. 시적 대사의 옷 벗기기 어쩌면 시인은 매저키스트, 그 우울증을 앓는 영원한 탐미주의자다.

 

시는 고슴도치다. 가까이 하면 서로 찔린다. 찔리지 않으려고 거리를 유지하고 저마다의 집을 찾아 등을 웅크린다. 웅크린 뒤에도 뽀족뽀족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다. 그런 독신주의자다.

 

고구려 사람은 해를 섬기고자 세발까마귀를 머리에 인다. 달을 섬기고자 거북을 머리에 인다. 인다는 것, 그것은 받듦이다. 해와 달을 받들 줄 안 슬기를 섬기고자 오늘 시인은 고구려 사람을 머리에 인다.

 

거미의 전생은 어부였을레라. 바다에 망을 치는 어부의 슬기로 거미는 허공에 망을 친다. 걸려드는 날벌레로 일용할 양식을 삼는다. 시인의 전생은 잠자리채여였을레라. 허공에 망을 치는 아이의 슬기로 시인은 잠자리채에 걸려드는 허공으로 시의 즐거운 양식을 삼느니라.

 

봄이 와도 왜 우리에겐 봄이 아닌가. 겨레의 허리를 묶은 휴전선이란 허리끈 때문이다. 허리끈이 풀려야만 맨살이 된다. 맨살로 서로의 살 부빌 때 비로소 뜨거운 피가 달아 한 몸 한 뜻인 겨레가 된다. 시 또한 대상과의 화끈한 맨살 비비기다.

 

자장암 금당 후면 바위 속에는 금개구리가 산다는 개구리 눈알만큼 한 구멍이 있다. 피리의 매듭 속에는 저승소리가 사는 피리 눈알만큼 한 구멍이 있다. 블랙홀 또한 우주의 구멍이다. 이승 아닌 저승이 구멍 속에 있다. 저승소리가 숨어 시는 피리, 그것은 블랙홀이다.

 

바다에서 사귄 언어에는 갯내가 난다. 산에서 사귄 언어에는 솔씨가 묻어 있다. 갯내를 데불고 산에서 논다. 솔씨를 데불고 바다에서 논다. 어느새 언어는 갯내도 솔씨도 아니다. 언어의 어울림. 시는 이 어울림으로 비로소 새로운 바다와 산을 껴안는다. 껴안기의 첫날 밤, 첫 입맞춤.

 

시인 전봉건의 연작시<돌>에는 한탄강 물빛이 어려 있다. 물새 울음소리로 닦여 있다. 떠돌이 피리소리로 잠겨 있다. 들릴 듯 말 듯, 거룻배 떠나는 소리를 한다.

 

역사는 먼지라고 현석 선생은 어느 수필에 썼다. 소리 없는 먼지의 쌓임. 먼지는 쌓일수록 두꺼운 역사책이 된다. 푸른 이끼가 된다. 흐득이는 눈발소리가 된다. 자진모리에서 중모리 진양조로 쌓이는 소리를 한다. 소리 없는 먼지, 그 속에 소리가 있고 역사가 있다.

 

누군가 날라리를 불고 있다. 저승 어디가 보이는 것 같다. 눈알 부라린 사천황상이 보이는 것 같다. 보이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면 보이지 않던 것 또한 슬그머니 눈을 뜬다. 휘갈긴 낙서를 뒤적거린다. 엉클어진 낙서 속에 비파를 켜고 있는 다문천(多聞天)) 어디가 보이는 것 같다.

 

연밥 꼬투리 속에는 뻘구덕에 잠겨 꿈지럭거리는 하늘이 있다. 구름이 있다. 바람이 있다. 알을 슬 때의 몸짓 같은 사부작거리는 향기가 있다. 연밥 꼬투리 속에는 그렇다. 햇빛과 달빛이 뒤엉켜 살을 섞은 햇빛과 달빛의 새끼가 있다. 새끼라고 불리우는 시가 있다.

 

시의 자궁은 무시로 빠개지는 고통에 찬다. 서정시며 서사시가 탯줄을 달고 자궁을 비집고 미끄러진다. 순수시며 참여시란 배꼽도 보인다. 셋 넷하며 질서 있게 따라붙는 모범생 같은 정형시, 삼삼오오 토막토막 갈래진 자유시, 지루한 행렬을 기다리는 산문시가 모래집 물속에서 눈을 뜬다. 빠개짐, 그것은 시를 위한 피흘림이다. 피를 흘려야만 비로소 금깃줄 하나 축제처럼 시의 대문간에 높이 걸린다.

 

시쓰기는 일종의 알까기이다. 암탉이 달걀을 까듯 시인은 시라는 알을 까는 암탉이다. 그런 즉 보라, 암탉이 울어야 시는 비로소 되는 집안이니라.

 

시는 옷고름이다. 풀면 풀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옷고름을 맺는다. 하지만 풀리지 않음으로 오히려 옷고름이다. 헤프게 가슴을 열지 않는 매서운 정절, 시정신이란 곧 옷고름 깊숙이 감춘서슬 푸른 은장도다.

 

시인의 가슴은 거문고다. 울음이 풀어내는 중모리다. 한 올 진양조 가락을 뽑아내기 위하여 시인은 시들시들 병을 앓는 오동나무다. 밤중에 깨어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본다.

 

 

-‘달팽이관 마을에서’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