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음식 솜씨에 대하여

―문장·소재·주제― 

                   /李正林

 




글을 처음으로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경향이다. 너무도 꾸미고 꾸며 나중에는 본인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는데, 초심자들에게 미문(美文)이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첫 번째 유혹이다. 그러나 미문이란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격이 낮은 문장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품격 있는 문장을 알아보는 눈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의 문리(文理)를 터득해 가는 과정을 나는 곧잘 여자들의 음식 솜씨에 비교해 보이곤 한다. 예전에는 혼인을 앞둔 여성들은 으레 '신부 수업'이라는 것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단연 음식 만들기였다. 그래서 장안에 이름난 요리연구소를 찾아다니며 음식을 배웠는데, 그러나 그것은 주로 실생활에서는 거리가 먼 별식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혼전에 그렇게 열심히 배워 둔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는 아기의 백일 때다. 새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배운 요리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식,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 가릴 것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식이라면 죄다 만들어 내니 그 모양이나 빛깔들 또한 얼마나 요란스럽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교를 부린 음식상에는 별로 먹을 것이 없다. 마치 음식점 진열장에 울긋불긋 만들어 놓은 가짜 음식들처럼 입맛이 당기지가 않는 것이다.

또 새댁 때 가장 당황하는 것은 남편이 예고도 없이 손님을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다. 미리 기별을 해주면 장이라도 보아 놓았을 텐데, 무엇으로 손님상을 차린단 말인가. 살림의 경험이 짧은 아내로서는 당황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런 새댁이 나이를 먹고 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이전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진다. 우선 상차림에서부터 변화가 오는데, 음식에서는 기교가 사라진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음식 같은데, 거기에는 만드는 이의 개성이 깃들어 있고 깊은 맛이 오롯이 배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차려 놓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음식을 특색 있게, 말하자면 일품요리를 맛깔스럽게 만들어 낼 줄 알게 된다. 또한 아무리 손님이 불쑥 찾아온다 해도 당황하지 않고 집에 있는 보통의 재료로 거뜬하게 상 하나를 차려 낼 수가 있다. 그야말로 살림의 고수(高手)가 되는 것이다.

문장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글을 처음 쓸 때는 나이 어린 새댁이 서툰 솜씨 자랑하듯 기교를 잔뜩 부리고 싶어한다. 한 문장에 형용사와 부사를 두세 개씩 넣어 아름답게 꾸미려 들고, 은유(隱喩)와 직유(直喩)를 남용하며 미문을 만들어 내기에 열중한다. 또한 문장에 수식을 많이 하다 보니 명사절과 같은 안긴문장도 거푸 나오게 된다.

그러나 문장의 격을 차츰 알아 가면서 화려한 기교는 어느 사이 걷어내지고 간결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문장이 간결해지면 뜻은 분명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간결함으로 인해 문장이 건삽해지는 것을 막으려면 또한 적당한 수식이 필요하다. 그 '적당함'의 한계는 마치 음식에 양념을 할 때 '소금 약간'이라는 분량과도 같다. 너무 많이 넣으면 음식이 짜지고 적으면 심심해서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양념(수식)이란 재료의 원맛(표현해 내고자 하는 진실)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간을 맞출 때, '소금 약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손끝에서 가늠되는 주부는 음식의 고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장도 많은 수련과 습작을 통해 그 격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소재란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소도구이다. 소재가 없이 자신의 생각, 즉 사상이나 철학을 곧바로 펼쳐 보이게 되면 수필은 관념적인 글이 되고 만다. 관념적인 글에는 생활의 실감이 배어 있지 않다. 수필은 우리 삶의 체취가 끈끈하게 묻어 있는 진솔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 삶은 아주 작고 구체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그 작고 구체적인 이야기, 그것이 바로 소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재들을 지나치게 많이 동원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초심자들은 새댁이 한 상에 여러 가지 음식을 그들먹하게 차려 내는 것처럼 한 편의 글에 많은 소재를 나열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만의 생각을 풀어 나갈 힘이 약하기 때문에 취하게 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아니면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동원하여 글 한 편을 메우면 된다는 작가의 안이한 자세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수필은 분명 우리 삶에서 구체적인 소재를 잡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나 그렇다고 소재주의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 소재를 아끼라. 언젠가는 소재가 없어서 글을 못 쓴다고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수필의 고수는 결코 소재를 남용하는 법이 없다.

주제란 글의 중심사상이자 작가의 철학이다. 문장도 좋고 끌어가는 힘도 좋은데 알맹이가 없는 글들을 흔히 보게 된다. 수필은 결코 입담으로 시종일관하는 수다스러운 글이 아니다. 소재는 음식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소재로 무엇을 만드느냐 하는 생각이 바로 주제 의식이다. 아니, 무엇을 만드느냐 하는 생각을 먼저 했기에 그 소재를 택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성상(귀납적 구성[歸納的 構成]과 연역적 구성[演繹的 構成])의 문제이지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에 오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수필을 흔히 신변잡기라고 폄하하는 것은 글에 주제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분명 우리의 생활 이야기에서 소재를 잡으나 그 소재에 어떤 주제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하찮은 이야기일지라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필은 이 의미화 작업을 통하여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문학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따라서 글에 주제가 없으면 신변잡기에 그치고 말고, 끌어가는 힘만 있고 주제가 없으면 요설(饒舌)에 그치게 되고 만다. 살림의 경험이 많은 주부일수록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도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수필에서는 재료(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맛(시각[視覺])이 중요하다. 손맛, 즉 시각이란 작가의 철학을 토대로 한 인생의 재해석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고수에게 시각이란 평범한 일상을 의미 깊은 문학으로 재창조해 내는 황금의 눈과도 같은 것이다. 신체의 눈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작가의 눈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눈도 수련을 통하여 연마될 수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