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격格

                                                                   유 병 근

 

 

 

1

언어예술의 한 분야인 수필 또한 대상을 참신하게 보고 느끼고 이를 문장으로 나타내는 문학이다. 대상이 품고 있는 은밀한 의미를 찾아 직조하려는 작업이 수필쓰기이다. 석공이 돌을 쪼아 돌 속에 잠재된 부처를 찾아내고 꽃을 찾아내는 작업에 견줄 수 있다. 그 일이 가장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수필쓰기가 된다.

 

하기에 수필은 대상을 번안하거나 복사하는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장 독창적이고 참신하고 개성 있는 수필가의 시선은 대상을 응시하는 눈과 대상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다. 소리를 보고 빛을 듣는 관음觀音의 길이 곧 수필에의 길임을 깨닫는다.

 

언어요리사로서의 수필가는 언어를 찾아 그 언어를 다스릴 줄 아는 기법을 익힌다. 하기 때문에 수필가는 언어의 속사정과 친하고자 그 속사정과 논다. 말을 보고 듣고 향기를 묻는다. 그것은 길 가다가 들을 수 있는 쌀값이야기거나 점포마다 수북하게 쌓이는 과일시세일 수도 있다. 길바닥의 먼지로 얼룩진 돌이야기가 수필로 승화되어 사물을 참신하게 다루는 표현문학의 단계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을 보는 직관력이 요구된다. 대상을 깊이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찾는다. 그것이 참신한 의미[depaysment]를 발견/부여하는 길이 된다. 이야기로 구성하는 서사적 흐름도 놓칠 수 없는 몫이지만 읽은 다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틈을 주어야 수필이 살아남는다. 그 속에 묘미가 있다. 모든 내용을 남김없이 드러낼 때 그 수필은 이야기 글에 지나지 않는 수필 이외의 몫에 처질 수 있다.

 

낯익은 언어를 재탕하는 것, 떠돌아다니는 언어를 자기언어처럼 쓰는 건 표절은 되어도 창의적인 몫은 전혀 아니다. 수필문학을 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대상의 새로운 국면을 찾아 그 대상을 새로운 가치로 뜻을 매기자는 것에 있다. “인생은 초로와 같다”는 처음 대단한 언술이었다. 하지만 그 비유는 이미 상식적이고 식상한 몫이 되고 말았다. 하기에 수필가는 새로운 세계, 참신한 비유를 찾으려 노력하는 언어탐구자이다.

 

춤추는 붓이라는 말이 귀에 닿는다. 묵화를 치는 화가의 신들린 붓놀림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초서체는 어떤 점 춤추는 모습이다. 신들린 글씨에 물결이 꿈틀거리고 용이 솟아오르는 기백이 있다. 어떤 사詐스러움도 볼 수 없다.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일삼으려는 언어나열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수필언어는 구석진 곳에 먼지처럼 숨어 있거나 길바닥의 작은 돌처럼 발에 걸려 굴러다니기도 한다. 하찮게 여기는 먼지와 돌에서 수필의 꽃이 피는 걸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쓸어낸 먼지는 먼지라는 세계를 갖는 하나의 존재임을 수필가는 깨닫는다. 굴러다니는 돌인들 이와 다를 바 없다.

 

수필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덮어씌우는 야단스런 일은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수필은 수필일 뿐 다른 잡티는 섞일 수 없고 섞일 경우 수필의 격만 떨어트릴 뿐이다. 수필은 화장을 마다하는 민얼굴이다. 그런 순수함이 웅숭깊은 수필정신이며 그 문학에의 당당한 길이다.

 

 

2

수필에서의 감동이란 멀리서 은은하게 울려오는 종소리에 비길 수 있다. 그 울림은 딸랑딸랑하는 종소리는 아니다. 소리의 긴 그림자를 남기며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여운 속의 소리, 그 소리는 은은하다. 함으로 종소리는 미美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저녁 무렵 깊은 산사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가슴을 적시는 파문을 일으킨다. 종소리 하나에 살아온 하루를 생각하고 종소리 둘에 살아갈 내일을 생각한다. 종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더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수필의 여운 또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종소리이다. 하기에 수필을 읽고 쓰는 것은 마음의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듣는 기쁨에 있다.

 

수필은 재미가 따라야 좋은 수필일 수 있다는 말은 수필의 깊은 여운과는 별개의 문제다. 재미는 흥미는 주지만 감동은 아니다. 웅숭깊은 강물은 은근한 여운[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졸랑졸랑 흐르는 개울물은 재미는 주지만 감동은 아니다. 수필에서 재미를 갖는다는 것은 개울물소리를 듣자는 일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에게 아나운서가 그 감동을 물을 때 역시 ‘이 기쁨’이지, ‘이 재미’는 아니다. 수필쓰기와 읽기에서 글 전체의 맥락도 중요하지만 그 맥락을 구성하는 언어 하나하나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감동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내용물을 거기 알맞은 언어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표현을 위한 상상력은 수필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미학의 한 측면을 두고 볼 때 수필은 언어미학으로서의 경지와 함께하고 이를 동반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 따로 미학 따로는 아니다. 수필정신 속에 미학이 있고 미학 속에 수필정신이 있음을 놓칠 수 없다. 이로써 보아도 수필은 언어미학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운문의 격을 초월하려는 수필정신이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겠다. 운문은 운문, 산문은 산문이란 엄격한 틀을 짜놓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자를 따돌리려는 엄숙주의에서 느긋해야 문학의 다양성에 값하고 문학이 동반성장하는 빛을 볼 수 있다. 문학은 외골수만을 선호하지 않는다. 거미줄처럼 얽혀 사는 세상에 운문과 산문의 틀이 서로 긴밀한 조직망으로 어울려야 비로소 든든하고 값진 문학으로서의 구성체가 된다. 비빔밥은 밥 따로 나물 따로 아닌 서로 어울려야 제대로의 맛을 낸다. 수필이 어디 비빔밥이냐고 생트집을 잡으면 어쩔 수 없지만.

 

수필세계 내부에도 대중성과 순수성이라는 기호嗜好 편향이 은근히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거칠게 말한다면 대개의 스토리중심인 수필[재미]은 대중성에 가깝다. 그러나 대상이 갖는 참신한 정서를 천착하려는 수필[기쁨]은 순수성에 가까운 수필이라고 거칠게나마 점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어설픈 잣대가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님은 물론이다.

 

대중성은 인기종목이 될 수 있으나 순수성은 인기와는 거리가 다소 서먹서먹하다. 사람은 대중의 중심에서 은근히 주목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 점 인기종목이 된 수필을 목에 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기를 노릴 때 입담 좋은 수필이 되기 마련일 뿐 대상을 새롭게 보는 측면에서는 무게를 잃기 쉽다. 인기는 한 때의 박수일 뿐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꽃이 되는 아쉬움도 있다.

 

수필은 논리성을 따지는 논설이나 학술문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산문이라는 집안이되 수필은 세상의 이치를 체계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필은 사물의 속내와 내통하는 정서를 내포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 수필은 야단스럽지 아니한 산책이라고 할까. 산책은 생각의 깊이에 골몰하느라 쓸쓸함과 동반한다. 이 쓸쓸함의 의미와 좌충우돌하는 고뇌를 갖는 자가 수필가이다.

 

이렇게 말하면 수필은 문맥을 도외시한 중구난방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하지만 그 문맥 없는 것 같은 맥락 속에 엄연한 문맥을 갖는다. 체계를 그다지 염두에 둘 일이 없는 수필은 서론 본론 결미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체계가 없기 때문에 흔히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없는 체계 속에 엄연한 체계를 갖는 것이 수필의 흐름이다. 이런 점 수필은 수필로서의 논리성에 은근히 철저하다.

 

수필에서의 서론 결미는 수필을 위한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수필의 뼈대는 강건하게 구성된다. 글의 중심인 본론이 서론과 결미를 모두 흡수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서론과 결미는 글을 위한 일종의 준비과정이며 글이 끝나감을 암시하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담백하고 감칠맛을 요하는 수필에서 굳이 군더더기를 내세워 글의 출발과 끝남을 알릴 이유가 없다.

 

‘안개같이 시작해서 사라지는 글은 가장 높은 글’이라는 말을 윤오영은『수필문학입문』(관동출판사/1975)에서 밝히고 있다. 어느 문학이나 다 그렇지만 수필 또한 문맥이나 내용에서 너절해 지는 것을 기피한다. 하기 때문에 굳이 서론 부분이니 결미 부분이니 하고 꿰어 맞추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 서론이나 결미부분은 본론 부분으로 함축시킬 때 글은 더욱 생동감이 살아남는 깊이 있는 수필이 될 것이다.

 

수필은 그 사람의 품격이라고 했다. 이를 의식한 나머지 현학적인 언술과 현학적인 인용으로 수필의 몫을 채우고자 시도할 때 수필의 격은 오히려 떨어진다. 수필은 일상적인 어법으로 만족하는 친서민적인 문학으로 생각하면 마음에 보다 큰 여유가 생길 것이다.

 

수필의 길이는 대개 원고지 열 몇 장이라는 고정적인 울타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에 매달릴 때 수필은 사무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매수에 끌려 길게 써서 줄이는 압축형은 단아미가 있지만 짧게 써서 너절하게 부풀려나가는 글에서 아쉽게도 감동이며 미적효과마저 놓치게 된다.

 

여기 한 접시가 있다. 과일을 담으면 과일접시가 되고 꽃을 꽂으면 꽃꽂이접시가 된다. 그런 변용의 아름다움을 갖는 글이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