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의 여운


                                                                                                                                 김애자

 글의 서두가 첫인상이라면 말미는 뒷모습이다. 사람이나 글이나 첫인상이 좋아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나 돌아서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워야 사람에게는 그리움이 남고 글에는 여운이 따른다. 만일 사람이 첫인상과 달리 약속을 잘 지키지 않거나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행위나 험담을 잘하면 얼굴값도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얼굴값을 못한다는 말은 곧 ‘당신을 믿을 수 없다’와 ‘당신과 친하고 싶지않다’라는 불신감을 나타낸다.

 글에 있어서 서두는 그럴듯한데 주제를 이끌어가는 진행과정에서 문장이 딸리고 구성이 어설프면 글이 치졸해진다. 반대로 작품을 다루는 기법도 문장도 구성의 짜임도 세련되었는데 글의 울림이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서두값(첫인상)을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다소 기교나 문장이 세련되지 못했어도 글 속에서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지고 작자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작품을 독자들은 요구한다. 결국 좋은 글은 성실한 생활관과 바른 정신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작가와 독자들은 다 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상승되고 그 속에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덕목이 들어 있다.

 필자는 작품의 소재에 따라 먼저 구성의 형식을 정한다. 글의 소재가 서정적이면 고리형식(전환의 형식)을 취하고 서사성을 띠고 있을 때는 평면으로 설정한 다음 결미에 이르러서야 주제의 핵심을 풍자나 해학으로 합성하여 표현한다. 그 밖의 철학적, 관념적인 글에는 사색과 명상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서정성을 띠고 있을 경우에는 독백이나 인용문을 도입하기도 하고 더러는 시적인 상징성을 내포하여 독자의 가유에 의미를 맡기기도 하는데 필자의 졸고 몇 편을 예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창 밖에는 여전히 봄비가 소곤거린다. 문풍지 바람에도 피가 잦아들던 내 젊음의 뜰에서 늘 어두운 그림자로 서성이던 아버지. 그분의 고혼孤魂이 실려 오는 걸까. 거미줄 같은 세우가 시린 음계로 종일토록 내리고 있다. -<춘매春梅> 중에서

 올해도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했던 그 무명의 희생자를 보내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뒤척인다.
‘일광日光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한 어느 소설가의 말이나 믿어볼밖에……. -<잃어버린 계절> 중에서

 ‘이래봬도 나는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수칙은 착실히 실행한다구요. 당신은 현실을 직시하는 이성주의자로서는 만점일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내가 당신보다 훠-얼- 씬 부자란 말입니다. 당신은 적자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해요.’
철딱서니 없는 아내는 이리하여 눈발이 분분한 창밖의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며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로 잠을 청하였다.
-<눈 오는 날의 삽화> 중에서

 서사적인 글은 서정적인 글보다는 아무래도 현실과의 관계가 ?씬 더 밀접하기 마련이다. 그 말은 곧 비판정신이 더 농후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우리의 전통적 기법인 풍자나 해학을 통한 결말 처리가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다.


 근세에 들어와 암탉도 수탉도 아닌 중성의 어르신네들이 득세를 하더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목청 돋우어가며 구두 뒤창이 닳도록 뛰어 천억 불 수출로 이룩해 놓은 경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암탉이 아니라고 양심선언하는 이가 없다. 정녕 닭이 홰를 치는 서기어린 새벽은 언제 올 것인가.
-<기지奇智> 중에서

 한편 철학적, 관념적인 글은 서정적인 글과는 달리 삶에 대한 사색과 깨달음의 내용을 주제로 드러내기에 시적이고 풍자, 해학적인 것보다는 명상의 결론, 혹은 자신의 다짐을 간략히 서술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제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사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방법론의 구심점이 글쓰기다. 비록 글 쓰는 일이 제 살을 깎아 먹으면서 벌이는 외로운 축제라 할지라도 문학은 내 삶에 부족함을 채우는 인간학이고 그리움의 미학이므로 나는 기꺼이 남은 생을 여기에 바칠 것이다. -<그리움의 미학> 중에서

 필자는 글의 마무리를 지을 때 지나친 묘사나 구체적인 서술을 피한다. 묘사나 서술이 구체적이면 독자들의 상상력을 침해하고 글 속에 들어 있는 청각적인 느낌이나 눈앞에 그려지는 화면의 효과까지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에 의해서다. 해서 글 문을 닫기 전 필히 살펴보는 몇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

 첫째, 소재와 주제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는가.
 둘째, 체험의 재생과정에서 과장을 부리지 않았는가.
 셋째, 제목과 서두와 내용이 잘 조응하고 있는가.
 넷째, 내용을 이끌어 나가는 문장의 호흡(장단)은 잘 맞는가.
 다섯째, 단락과 단락을 연결해 나가는 간격은 일정한가.

 이러한 사항들을 검토하고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다. 이때에 유념할 것은 쓸데없는 사족은 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청탁 받은 원고 매수가 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다 보면 문장이 늘어진다. 그런 경우일수록 과감하게 언어(문장)를 절제해야 한 다. 그래야 주제가 흐트러지지 않고 전달이 빠르다.

 그러나 말처럼 이렇게 칼로 자른 듯 감정의 절제나 언어의 절제가 쉬운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단계까지 이르려면 삶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 실상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독서를 통한 지적인 체험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날카로운 시선,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새로운 앎을 거쳐 사물의 이해나 사고의 폭이 더 깊어질 때 인격이 고양되고 좋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을 수 있다. 그래야 종이 위에 찍혀 있는 검은 소실점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글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아니 누군가의 가슴에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하나의 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