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 윤오영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으므로 매화(梅花)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蕭瑟)한 바람이 상강의 넋을 실어 오는 듯 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神技)가 이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들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심안(心眼)이다.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백아(伯牙)가 있고, 또 종자기(鐘子期)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뜻을 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讀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作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時代)의 공민(共悶)이요, 사회(社會)의 공분(公憤)이요, 인생(人生)의 공명(共鳴)인 것이다.

문인(文人)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身邊雜事)를 즐겨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片貌)와 생활의 정회(情懷)를 새삼느꼈기 때문이다.
속악(俗惡)한 시정잡사(市井雜事)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凝視)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잡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情)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寡黙)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 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張皇)하고 산만(散漫)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의 여운(餘韻)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 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吟味)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멀 수로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고, 이런 글이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