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함축과 절제에 대하여
 

                                                                                                                                   이정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철학·사상을 남에게 전달하려면 말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말이 너무 많으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하고, 말을 너무 아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누누이 설명하다 보면 군더더기가 되어버리고, 극도로 자제하다 보면 글이 비약적이 되어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작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독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다면, 사족이 될 뿐만 아니라 문장은 탄력을 잃게 된다.

 반대로 필자가 설명을 해줘야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함축해 버린다면 이것 역시 설득력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주제와 상관없는 말은 생략하거나 함축하는 게 좋은데, 그런 대목이 중간에 끼어들면 주제로 향하던 문맥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예문을 들어본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다. 3학년까지는 동네 옆에 있는 분교(分校)에 다녔지만 4학년부터는 4킬로미터나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본교로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본교에는 고학년뿐만 아니라 저학년에도 한복 입은 아이가 거의 없었다. 양복에는 주머니가 많았다. 저고리에 두 개, 바지에 두 개. 네 개나 되는 호주머니에 채울 것이 없어 바지 호주머니에는 손을 넣고 다녔다.
―김형진, <주머니> 중에서

 위의 글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한복을 입다가 4학년 때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는데, 그 양복에는 한복에 없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어 신기해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밑줄 친 부분은 양복을 입게 된 배경임으로 생략해도 무방하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다. (그런데) 양복에는 주머니가 많았다."로 곧장 이어지면 글이 더욱 간결해질 것이다.

 여인은 뛰다가 지치면 걷고, 어느 때는 둔치에 주저앉아 쥐어뜯은 풀잎을 물 위에 띄웠다. 떠내려가는 이파리를 보면서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 댔다. 잠시 떠내려가다가 제자리를 맴도는 풀잎은 아마도 그 아들의 넋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 여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어찌 정해 놓고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고, 이미 간 것은 그리움으로 남기고 다가오는 것은 기다리며 살다 보면 그런 대로 잊고 살아지는 게 아니겠느냐고….
 어느덧 강둑에도 가을은 깊어지고 있었다. 추적거리는 비가 잦아지고 코스모스의 긴 허리는 휘어만 갔다. 이제 그를 괴롭히며 뒤따르던 녀석들도 보이지 않고, 어느 때부터인가 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임병문, <달리는 여인>

 아들을 잃어 실성한 여인을 보면서 작가는 그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밑줄 친 부분은 절제하는 게 좋다. 작가는 충고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좋고, 교훈적인 메시지는 여운으로써 암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작가는 독자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공감의 여운을 던져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 실내는 여기저기 거미줄이 엉켜 있어, 환풍구로 삐주름히 들어오는 햇살은 일차로 거미줄에 먼저 걸렸다. 그런 후에는 차차로 광도가 떨어져서 햇살이 막상 땅바닥에 닿을 즈음에는 뿌옇게 이지러졌다. 그런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소설 속의 연애 장소로 등장하는 방앗간이 썩 쾌적한 설정으로 공감되지 않는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이 물방앗간이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정사 장소로 설정되어 있다. <물레방아>에서는 주인공 이방원이 자기 아내가 지주 신치규와 방앗간에서 간통하고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자살을 하고,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허 생원이 성 서방네 딸과 정을 통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가을철, 솜을 타고 쌀가루를 빻아 오노라면 어느덧 밤은 이슥해지고 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댔다. 그런 밤길에서 어머니와 나는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었다.
―임병식, <물레방아>

 어렸을 때 본 물레방앗간의 인상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쓴 글인데, 밑줄 친 대목은 책 속에서 얻은 지식임으로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현학적인 요소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은 절제하는 것이 좋다.

 지금 생각하니 조그마한 초가집에 살면서도 장미를 마당 가득 정성껏 가꾸시던 그 애의 아버지는 참으로 멋있는 분이셨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 아버지처럼 어두운 일제시대를 실의 속에서 장미꽃 가꾸기로 시름을 달래 보려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 가족이 육이오를 어떻게 무사히 보냈을까. 지금도 그 마당에는 장미꽃이 해마다 그렇게 아름답게 필까.
―이영희, <장미>

 어린 시절의 친구 아버지는 장미꽃을 가꾸시던 멋있는 분같이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아버지처럼 불운한 시대의 시름을 달래 보려 그러셨는지도 모른다고 유추해 보는 대목이다. 그러면 다음 문단에서는 작가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전제만 해놓고 건너뛰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함축이 아니라 설명을 해야 한다. 수필의 묘미는 함축과 절제이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뜻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