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물을 주는 작업
-문학의 실천

류 인 혜



  문학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보다 경쟁심이 앞서는 시대이다. 앞선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는 듯 쉬운 일이 되어 존경의 마음대신 자신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키운다. 길이 넓게 열려 있으니 문학이나 문학에 관련된 일은 특정인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누구든지 책을 펴낸 저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연히 문학이론의 정립을 회의적으로 생각한 글을 읽었다. 오래 전에 그 글을 쓴 저자가 요즘처럼 문학이 대중화되고 다양해진 시대를 미리 예견했던가, 어떤 과학적인 근거로 질서를 찾을 것인가를 우려했다. 문학이란 범주 아래 표현의 방법이 복잡해진 현실이지만 그 모든 양상이 문학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문학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라는 말에는 공감하여 문학인의 자존심을 어떻게 세워야 되는가, 고민한다.

  이 글에서는 내 정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문학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 ‘구체적’이라는 의미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는 전제가 붙는다. ‘실천’이라는 단어는 아무 간섭받지 않는 조건에서 개인의 의지가 행동하는 것이다.
  내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의 문학적 형상화는 오랫동안 곁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를 편하게 대하는 수준이다. 한마디 더 변명이 있다면 서툴기가 짝이 없는 솜씨로 세워 놓은 문학이라는 문패가 붙은 공중누각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는 일이다. 가끔 스스로도 미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어찌하든 그 일을 도모하는 노력에 대한 긍정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또 글의 제목을 <영혼에 물을 주는 작업>이라고 한 것은 문단이라는 거대한 숲으로 이끈 작품인 추천완료 작 <우물>의 영향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마음을 다지는 의미로 그 수필의 몇 문장을 적어 본다.

  영혼은 인간이 정성껏 파 놓은 우물이다.
  우물은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도 언제나 마르지 않는 풍성한 깊이와 내용을 간직하면, 마음의 두레박이 한가득 내면을 담아 올릴 때 그 흔들림으로 즐거워지고 생기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베란다로 나가서 늘어놓은 화분을 살핀다. 손으로 흙을 만져 보아 말라 있는 곳에 물을 주고, 마른 잎은 따 주고, 기운을 잃은 화초는 그 이유를 알아본다.
  점점 늘어나는 화분들의 관리가 힘에 벅차 그 중에서 보기 좋은 놈들을 골라 다른 집으로 보내고 있다. 그 작은 식물들과 교감을 나누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며 지내라는 뜻이다.
  문학의 실천도 그렇다.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 날마다 늘어난다. 글이 글을 이끌어 내듯이 저절로 가지를 치는 상상력으로 인하여 문학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 상상을 도우는 일이 영혼의 밭을 경작하는 일이다. 화초의 성질에 따라 물을 주는 간격이 다르고 햇볕을 쬐는 강도가 다르듯이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이 주는 감동의 색깔에 따라서 각기 다른 종류의 작품을 쓸 수 있다.
  문학이 존재되는 것이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라지만 글의 재미는 남녀노소가 다르고 사람마다 취향이 있어 재미를 느끼는 내용이 다르다. 가장 보편적인 재미는 어떤 것일까, 이 글에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지 말고 나만 바라보자.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은 성경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거나 어떤 상황에 알맞아 내게 힘이 되는 말씀에 밑줄을 긋는다. 그 말씀들이 기초가 되어 내 문학을 이룬다. 날마다 뿌리는 물같이 영혼의 밭에 흘러드는 영양분이다. 그러니 성경은 문학적 삶을 이루는 길잡이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71편 5절에서 6절

  사람의 삶은 오리무중이다. 내가 나를 모를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속을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가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한 느낌을 얘기하면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클 때가 있다. 사람들이 웃으며 즐거워하니 그 웃음을 생각의 기발함과 참신으로 인함이라고 여겼다. 정작 내용을 들여다보면 나잇값에 미치지 못하여 어이없음의 헛웃음일 경우가 있었고, 모든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거나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불문율처럼 여기는 것이거나, 당장 현실에 소용이 되지 않는 발상도 있었다.
  그런 어이없음을 묵살하면서 생긴 오해가 내 문학을 이루게 도왔다면 지나친 농담일까. 내용이 달라도 다른 이의 웃음을 재미로 여기기로 하니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그 어릿광대 같은 농담놀이가 재미있었다. 가끔 스스로의 농담에 빠져서 심경이 어지럽고 복잡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들고 싶을 때도 있다. 그때 위로 받는 말씀이 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7절에서 10절

  물론 영혼의 밭을 가꾸는 일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본래부터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문학을 바라보며 그 실체를 자각하는 것은 노력의 여하에 있다.
  그렇기에 문학의 밭을 경작하는 일은 고행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늘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에 지쳐 있지만 지나친 고생으로 몸서리치는 어려움이 아니라 엄숙하고 경건한 고행이다. 저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무릎으로 높은 성지에 오르거나 땅에 전신을 대면서 전진을 하듯이 문학의 신성함을 경외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내 문학의 길은 언제나 골짜기의 푸른 초목들을 보려고 달려가는 마음이다. 나무의 순과 꽃이 피어나는 가려움을 함께 느끼며 전율하는 즐거움이다. 혼자 즐거워하는 부지중에도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아가서 6장 10절에서 12절

  오늘도 돌보아야 되는 분신 같은 화분에 물을 준다. 화분의 배수구로 필요 없는 물이 흘러나가고 남은 수분에 흙이 촉촉이 젖을 때까지 듬뿍 뿌려준다.
문학은 또 그렇게 말라가고, 혼돈되고 지쳐가는 영혼에 물을 뿌리는 일이다. 내 영혼의 밭에 뿌린 물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깊어져서 경건한 고행인 문학의 실천이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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