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혀지는 수필

金時憲

1. 수필이 주는 쾌감

잘 쓰여진 수필 한 편을 읽고 나면 더운 여름날 생맥주 한 잔을 마신 것처럼 쾌감이 온다. 생맥주는 육체적인 조건에서 쾌감이 오지만 수필은 정서적인 조건에서 쾌감이 온다. 그러나 쾌감의 신선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 쾌감에 끌려서 사람들은 시를 읽고, 수필을 읽고, 소설을 읽는다.

수필을 읽고 있으면 왜 쾌감이 오는 것일까? 수필 속에 있는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조건에 놓여 있을 때 작자의 정서가 최대한 독자에게 전달되느냐고 물으면 문제는 어려워진다.

작자에게는 있고 독자에게는 없는 정서가 있고, 작자의 것은 높은데 독자의 것은 낮은 정서도 있다. 작자와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물은 문장이다. 문장이 난해할 때도 독자는 장애를 받는다. 수필을 읽으면서 국어사전을 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난해하면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껑충껑충 넘을 수밖에 없다.

문장의 난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현상의 기교이다. 문학의 무기는 문장이고 문장의 예술성은 기교에서 확보가 된다. 무기가 둔하면 작자의 내면에 있는 넓고 깊은 정신세계를 다 캐낼 수가 없다. 설사 캐냈다 해도 여기저기 흠집이 생겨서 독자의 고개를 흔들게 만든다.

기교는 무기교의 기교가 좋다는 말을 한다. 여인의 화장은 안 한 듯이 한 화장이 최고의 화장이란 말이 있듯이, 문장의 기교도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완벽한 수필 한 편은 예술품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형식과 내용을 통해서 미적 조건을 갖출 때 그것을 예술품이라 한다. 예술은 감동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우선 감동을 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감동은 가슴을 흔들어서 그 안에 있는 찌꺼기를 몰아내고 즐거움이라는 선물을 독자에게 제공해 준다.

수필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문학은 체험의 재구성이다."라는 말을 한다. 체험의 재구성이라 할 때 수필은 그 체험 자체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작은 체험에 많은 허구가 합쳐지지만, 수필은 많은 체험에 작은 창작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수필은 작자와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힘이 직접적이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쌀로써 만들어 놓은 밥이 수필이라면, 술을 만들어 놓은 것은 소설이라고…." 술처럼 취하는 마취가 소설에 있다면, 밥을 먹은 뒤의 친근감은 수필에 있다. 수필은 독자에게 친구와 같은 신뢰와 인정을 준다. 그 신뢰와 인정은 이성(異性) 사이에서 오는 매혹적인 인력이기보다 친구 사이에서 오는 은근과 친화의 인력이라 할 수 있다.

2. 독자가 원하는 수필

"있어야 할 미래의 수필"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수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다. 발표자의 한 사람은 수필이 좋으면 그것이 곧 "미래의 수필이 될 수 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제3의 물결이 흘러닥치고 있는 오늘의 수필이 구태의연한 어제의 수필로는 새 시대의 독자를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 시대에 맞는 새 수필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사이에 좀은 상대적인 뜻이 있다는 의문도 가졌다.

후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컴퓨터 문화가 20대, 30대의 머리 속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오늘인데, 그들에게 구태의연한 어제의 수필이 수용되느냐이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이 부어져야 한다는 뜻도 된다.

그들의 정서는 지금 어디까지 가 있는가. 책에 쓰여진 또박또박한 문자를 읽던 그들은 지금, 컴퓨터에 나오는 기계화된 전광판을 판독하고 있다. 그 판독을 통해서 정서에도 기계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거리에는 남이 보든 말든 20대의 청춘 남녀가 포옹을 하고, 키스를 감행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50대, 60대의 눈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20대의 정서 사이에는 어떤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가? 사랑의 행동은 자유인데, 그것이 예의와 도덕에게 얽매여야 할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이광수는 70년 전에 자유 연애를 외쳤지만 지금의 20대는 그 자유 연애에 자유 행위를 첨가하고 있다.

50대, 60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인가, 질시인가, 이해 불가능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등 착잡한 감정이 일어날 수도 있다. 20대의 정서를 부정적으로 보기에는 이미 엄연한 사실로 굳어 가고 있고,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과거의 정서가 아직은 따라 주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의 사이에서 수필은 어느 길을 가야 하느냐? 그들의 정서를 이해와 인식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체험하고 느끼지 않으면 그 세계의 실정을 바로 알지 못한다. 인식과 체험의 거리를 좁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래서 새 시대를 따라가야 하는 미래의 수필에는 스스로 한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음은 전자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재미가 있고, 철학이 있고, 익살과 풍자와 기지가 있는 수필이라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읽힐 수 있다는 이론이다.

500년 전의 수필이 지금도 읽혀지고 있듯이 앞으로 또 500년 후에도 읽혀지는 수필이라면 곧 명작이고 고전이 된다. 그러한 수필이면 미래의 수필이 될 수 있다는 말에도 수긍해야 할 근거가 충분히 있다. 그렇게 되면 제3의 물결 같은 새 시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영원한 공통성에 수필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 시대에는 그 문학이 더 많이 읽혀진다는 양적인 문제이다. 시대를 잘 반영한 작품이 곧 명작이냐의 문제도 있지만 시대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수필 독자의 질은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도 있지만, 양(量)은 초월하기가 어렵다. 새 시대는 새 감정의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 시대의 감정을 여실하게 표현했을 때라야 독자가 많다. 한때 많았던 독자가 다음 시대에 줄어들었다면 새 감정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도 읽혀지는 수필이 있다고는 하지만 양(量)에는 스스로 증감이 있다. 문학에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별성은 시대를 잘 반영하지만 보편성은 그것을 초월한다.

"미래의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세미나는 많은 공부가 된 모임이었다.

독자는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슬프게 해 달라, 즐겁게 해 달라, 생각하게 해 달라, 울게 해 달라, 꿈을 가지게 해 달라, 몸서리치게 해 달라…" 등이다.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글이란 참 어렵다. 그 중 한 가지만 만족시킬 수 있어도 좋은 글이 되지 않겠는가.

독자의 만족은 곧 작가의 만족이 된다. 작가의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수많은 다른 자기를 문장으로 꺼내 놓고 보면 그것이 곧 남의 것도 된다. 그래서 누구를 위한 글이기보다 자신을 그려낸 것이 마침내는 독자를 위한 것으로 귀결이 된다.

3. 소설의 독자와 수필의 독자

소설은 허구에서 진실을 얻고, 수필은 실제의 체험에서 진실을 얻는다. 허구의 진실과 체험의 진실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소설은 작자인 소설가가 작품 밖에 따로 있으면서 작중 인물을 창조한다. 강태공이 언덕에 앉아서 못 속에 있는 고기를 낚아 올리는 자세라고 할까. 수많은 인간 군상 중에서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고기는 작가가 다루어 보고 싶은 어떤 인간형이다. 그 인간형을 통해서 소설가는 자기의 철학을 표현한다. 소년일 수도 있고, 노인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고, 여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작자의 철학은 표현이 된다.

성격을 부여하고,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을 부여한다. 그 때 소설가는 작품 밖에서 무에서 유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다. 그 엉켜지는 사건이 모두 허구인 것이다. 소설가는 허구를 통해서 진실을 표현한다. 그래도 독자는 소설의 내용이 허구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소설이 허구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허구이든 아니든 작품 속에 있는 꿀을 자기 것으로 맛있게 흡수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수필은 다르다. 강태공처럼 앉아서 남을 다루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룬다. 자기가 작품 속에 뛰어들어가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록 남을 소재로 선택해도 그 남에게 표현되는 생각과 감정은 작자 자신의 것으로 돌아온다. 이유는 수필이 체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설사 수필이 체험이 아닌, 허구에 의해 쓰여졌다 해도 독자는 그것을 체험의 사실로 믿어 버린다. 몇 백년 전의 옛날부터 독자는 수필을 체험의 기록으로 믿어 온 역사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 얻는 진실은 작자와 직접은 연관이 없는 객관적인 진실이 되지만, 수필에서 얻는 진실은 작자와 바로 연결이 된 주관적인 진실이 된다. 다 같은 진실이면서 하나는 작자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고, 하나는 간접적인 관찰이 있을 뿐이다.

허구로 된 수필 한 편을 썼다고 하자. 부부 싸움이 잦은 여인이 가끔 이혼을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그는 이혼 뒤의 여러 가지를 상상해 보았다. 세월이 지나가면 마침내 다른 남자를 알게 되고 그러다가 새 애인도 생긴다. 새로 얻은 애인에게 가는 감정도 느끼면서 어느 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있을 수 있는 극적인 사건도 생각해 본다.

위와 같은 상상 속의 이야기를 여인은 실감나게 사실처럼 수필로 써서 발표했다고 하자.

그랬더니 어느 날 그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좀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너 기어이 이혼했더구나. 잡지에서 수필 읽었다…." 했다고 하자. 이혼 한 일이 없는데도 허구로 쓴 수필을 읽고 친구는 사실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허구일 때는 허구라는 사실을 글 속에서 암시나 언어로 밝혀야 한다. 밝히지 않았을 때 독자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위의 상상 그대로를 만약 소설로 썼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속의 허구를 실제로 믿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작자를 만났다 해도 "이혼을 했더구나." 따위를 물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까닭은 소설을 허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진실과 수필 속의 진실에 구별이 있는가. 두 가지가 다 문학적인 진실인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수필은 작자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감도와 신뢰와 친근감에서 직접적인 감정을 전달해 준다.

4. 작자와 독자 사이

작자는 생산자이고, 독자는 소비자이다. 하나가 공급자라면 다른 하나는 수요자가 된다. 생산자의 제품이 양질이면 소비가 잘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자의 수효가 반드시 작품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에 독자의 독후감을 실은 신문을 읽은 일이 있다. 자기는 대학 교수이고 인문과를 담당하고 있다. 시를 좋아해서 읽는 기회가 많다. 한데 어떤 시는 난해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시를 쓰려거든 잡지 신문에 발표하지 말아야 한다. 나 같은 수준의 독자가 읽을 수 없다면 몇 사람의 독자가 읽겠느냐. 시로 남의 시간과 정력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라는 요지였다.

난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독자가 작가의 정신세계에 이르지 못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보다 표현 곧 문장이 어려웠을 때이다. 시뿐 아니라 수필에도 같은 경우가 있다. 독자가 작자의 정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문장이 어려웠을 때는 작자에게 책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쉽게 써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내용이 어려워지면 문장도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가 가능한 것 같기도 하지만 노력 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해한 문장에다 권위를 부여하던 때는 이미 지나갔다. 독자를 잃어 가면서까지 권위를 세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독자의 구미에 맞추면 잡문이 되기 쉽고, 문학성을 강조하면 독자가 떨어져 나간다. 그 간격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나? 문학뿐 아니라 음악에도 유행가와 순수 음악의 간격은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 대중을 위한 예술이냐는 어느 시대에도 있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수필을 잡문으로 만들 수는 없다. 독자가 없는 수필이 쓸쓸하듯이, 잡담으로 끝난 수필도 쓸쓸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독자를 위한 수필에의 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필자 소개

수필가(1925∼). 1965년 《現代文學》지에 수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 수필집으로는 《멋을 아는 사람》, 《두만강 푸른 물에》, 《오후의 思索》, 《해질 무렵》,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수필을 말한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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