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의 의미화에 대하여 / 이정림 (李正林)


수필의 소재는 허구가 아닌 실재(實在)로서,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신변의 일들 중에서 취택한다. 그러나 글감이 되는 이야기를 여과 없이 옮겨 놓는다고 해서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체험한 이야기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소재에 대한 의미화를 해야 하는데, 의미화란 바로 그 글의 주제인 동시에 작가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이다.


초심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소재에 대한 의미화가 아닌가 싶다. 소재에 대한 의미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깊이 파고 들어가는 사유(思惟)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글감을 본 대로 들은 대로 직관(直觀)에 의해서만 서술한다면 글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글감, 즉 소재는 수필의 원료(原料)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료를 어떠한 '솜씨'로 빚어내느냐에 따라 문예적인 수필이 될 수도 있고 신변잡기가 될 수도 있다. 또 얼마만한 '깊이'로 소재에 대한 의미화를 하느냐에 따라 주제가 있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스케치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진섭(金晉燮)은 일찍이 "생활인의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표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철학이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철학은 결코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그 과정을 통하여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되는데, 그 생각이 발전하고 심화(深化)되면 바로 철학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여도 그 가슴속을 깊이 파 들어가 보면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평소에는 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하게 어떤 사건과 맞닥뜨렸을 때 그 사건을 대하는 느낌이 오게 되고, 그 느낌은 자기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철학을 일깨워 표면으로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그러므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지는 체험만큼 생각도 쌓여지게 마련이다. 이런 생각들이 소재의 의미화를 가능케 하고, 작가로 하여금 주제가 있는 수필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소재의 의미화, 그 구체적인 사유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예시 1>
아침에 외출을 하는데 시장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노점상을 하는 두 여인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큰 소리가 오가더니 마침내는 감정이 격앙되어 육탄전까지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구경은 뭐니뭐니해도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 최고라고 쓴다면 그 글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 그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들의 싸움 그 자체에 의미화를 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왜 아침부터 싸움을 하게 되었을까. 작가의 사유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점상들에게는 아침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날의 매상에 차이가 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리다툼은 양보할 수 없는 생존 경쟁의 일환인 것이다. 여인들이 험악한 모습으로 싸우는 그 광경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거기에서 엄숙한 생존의 아름다움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면 작가의 시각은 따뜻해질 수밖에 없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예시 2>
버스 안에는 남학생들을 인솔하고 탄 여자 선생이 있었다. 야외수업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학생들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서 차내는 몹시 시끄러웠다. 운전기사가 참다 못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무안하기도 했을 것이고, 자기들이 너무 떠들었다는 것을 뒤미처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 여 선생이 아이들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잘 참았어!" 이 말은 이유야 어떻든 자신들을 나무란 기사에게 대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학생들을 역성 들어준 선생님의 마음씨만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한층 더 깊이 사유한다면, 제대로 어른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감정만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애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쓴 소리로 일러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어른 노릇을 하는 게 아닐까. 작가는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이 간단한 사건에서도 사유할 수 있는 명제를 얻어야 한다.


<예시 3>
젊은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그러고는 습관대로 경로석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세 사람이 앉게 된 나머지 좌석에는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얼마 후 한 중년 남자가 올라탔다. 그런데 그는 빈자리가 있는데도 앉지 않고 그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자꾸 손으로 가리켰다. 아이 엄마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사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랐는데, 몇 정거장 안 가 곁에 있는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손가락질에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가 가리킨 것은 "경로석"이라는 글자였고, 여기는 당신네 같은 젊은이가 앉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의시켰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뜻을 기어이 관철시킨 남자의 용기에 대해서일 것이다. 용기가 없으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어려운 법이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농아(聾啞)였다. 그렇다면 '용기'라는 주제에서 하나 더 깊이 들어가, 말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침묵의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말 못하는 사람이야 물론 침묵하고 싶어서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쉼 없이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말하지 않고도 남을 설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최대의 웅변이 될 것이다. 무언(無言)의 힘이라는 명제, 그것은 농아의 선천적인 침묵을 떠나 우리 모두가 사유해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재의 의미화라는 것이다.


<예시 4>
아이가 둘인 어머니가 있다. 늘 두 아이만 지내는 것이 안되어 보여 지방에 있는 친구네 집에 놀러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방학 때면 한 해는 친구네 집에서 아이들이 올라오고 그 다음해에는 이쪽에서 내려보내게 되었다. 이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친척집에 가서 사촌들과 재미있게 놀던 추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재로 글을 쓴다고 하자. 왜 자신은 자기 아이들을 친구네 집으로 놀러 보낼 생각을 했는가. 단순히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면 이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어렸을 때 친척집에 가서 놀았던 일이 왜 좋았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집을 떠나 일가 형제들과 섞여 지내면서 잘 지내다가도 다투고, 그러다가도 양보하고 화해하며 어울리는 법을 자연히 배우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일들이 살아가면서 대인관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 아이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소재에 대한 의미화는 결국 사고(思考)의 수련이다. 수필은 우리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활의 평범성을 벗겨낸다. 임어당(林語堂)은 이를 "생활의 발견"이라고 했다. 생활을 발견해 내는 눈, 그것을 일러 소재의 의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