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록지로서의 수필 / 유인실

 

 

“왕은 죽었고 새 왕은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말처럼 적확한 비유는 없을 듯싶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하여 종종 언급되는 이 구절은 최근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가장 굵은 이슈는 코로나19였다. 나라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의 시간’은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와 우리의 삶을 폭풍처럼 뒤흔들어 놓았다. 일상을 멈추고, 학교를 멈추고, 삶의 현장을 멈추게 했다. 이 멈춤의 시공간을 온라인 플랫폼이 장악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는 더 소외되고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경쟁력, 능률성, 효율성 등을 강조하는 가치들에 대해 반성하며, 정당화되어 왔던 체제, 규범, 제도들과 위계화된 이분법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는 죽어 가는데 아직 새로운 삶의 질서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 왕은 죽었는데 새 왕은 오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어떤 새 왕을 오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는 어쩌면 지금의 펜데믹보다 더 파괴적인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부침의 시간을 반복하면서 진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퇴행하기도 했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퇴행할 위기에 처한 이 시간도 어쩌면 무수하게 놓쳐버린 과거의 어느 시간대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회가 우리가 반복하여 놓쳐버린 역사를 새롭게 주목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우리가 흘려보내고 배제하고 놓친 역사들은 무엇일까?

​  되돌아보면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현대사라 할 만큼 재난으로 점철되어 왔다. 일제 강점기를 비롯하여 한국 전쟁, 국가재건과 산업화 시대, 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시대, 이후 역사 후유증처럼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참사 등의 한국 역사는 수많은 재난 현장을 경유하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감염으로 인한 재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혹독한 재난들을 통과해 오는 동안 재난 속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되었던 재난의 고통에 대해 시대를 증언한다는 문학은 이에 얼마나 주목했는지, 또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불러일으키고 환기해야 할 공동체의 윤리와 앞으로 재난 ‘이후’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문학은 어떤 사유를 지니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역사는 수많은 개인의 선택의 합이 모여 그 밑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한다. 결국 미래라고 하는 것도 오늘의 우리들의 생각과 선택의 집합 속에 이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체적 위기에 처한 오늘날 현실 속에서 문학은 어떤 사유의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의 집합들로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오늘날 문학 현장에서는 수필문학이 대세를 이룬 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양적인 측면에서는 프로작가라는 영역 외에 아마추어 작가 영역도 상당히 두터워 그 위세가 한층 강력해 보인다. 이러한 양적 팽창에 비해 수필의 질적 평가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창작의 치열함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담보되지 못한 채 수필을 양산해 내는 수필가들의 안일함과 함량 미달의 글에도 작품의 무게를 달아주는 평론가들의 주례사비평, 그리고 작가의 사회적 위상이나 인지도에 의해 문학의 위상이 구축되는 수필문학계의 안이한 풍토 등도 이런 평가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성급한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최근 수필은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비교적 벗어나 있다. 그동안 ‘좋은 수필’의 전형으로 생각해온 전문적 지식, 현학적인 이성, 우아한 교양보다는 1인칭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 사회적 탐사기록에 가깝게 재현한 수필들이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쓰기 욕망, 기록의 욕망, 자신의 발견에 대한 욕망이 수필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가감 없이 표출되고 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가공 자아인 페르소나를 찢고 과감하게 민낯을 드러낸다. 오늘날 독자들은 작가라는 타인의 개인적 삶과 자신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공동의 감각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러한 수필을 통해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독자들이 작가에게 요구했던 공감의 기대 지평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은 수필이 새로운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수필이 다양한 형식을 포괄하는 의미의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에스노그래피적 수필은 미래 수필의 한 방향이 될 수도 있다.

 

 

 

우리말로 문화기술지文化記述誌를 뜻하는 에스노그래피는 인간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정성적, 정량적 조사 기법을 사용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술하고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의 연구방법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인종, 젠더, 계급 등 인간 삶의 다양한 분야를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와 개인의 일상을 가장 핍진하게 기록하고 재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수필은 분명 문화기술지로서의 의미를 담보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삶의 솔직한 모습을 미학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이지만, 그 사회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당대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현실의 진실(진짜)을 재현하는 것. 그렇다면 그토록 수필을 폄하하는 ‘증거’로 제공되었던 이 ‘일상성’이 오히려 사회 문제를 접근하는 가장 동시대적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코로나 위기가 닥쳐왔을 때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에 대한 다각적인 의제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의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위드 코로나(with corona)가 일상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위드 코로나는 앞으로도 이 위기가 계속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타자의 삶과 세계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나 홀로 아리랑’은 이제 더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의 간극을 좁히고 공동의 감각을 서로 확인하는 일, 바로 그 역할을 문학이, 수필이 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를 가장 잘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속한 사람이다. 수필은 서술 주체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텍스트로 형상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관찰자이자 주체이다. 따라서 수필가들은 좀더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예컨대 재난의 시대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찰할 대에도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지 말고 재난의 대상, 사건, 현장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해야 한다. 그가 왜, 어떻게 그 현장에 있게 됐는지, 재난 이후의 과정이 누구의 힘에 의해 전개되는지, 누구의 눈으로 재난이 해석되며,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 등 ‘그 재난의 위치성과 접근의 층위’를 통찰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은 ‘대상’에 대한 재해석과 인식의 지평을 여는 ‘고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재난의 시대 수필 쓰기는 자신의 발견은 물론 일상의 불평등한 구조를 기록하고 증언하고 재현하는 중요한 장이 되기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본 대로 접촉하게 된 세계에 대해서 진실을 쓰는 에스노그래피로서의 수필이 또 한 축을 구축해 나갈 때 우리의 수필 문학은 현재진행형으로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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