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매일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수필' ] 마헤경-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을 땐 말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밥은 하루만큼의 태엽이고 끈끈한 다정함이다. 어둠과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밥이 그리워진다. 나에게 말은 의미의 모양이며 활짝 열리는 관계의 끈이다. 밥이 키운 말들이 따뜻한 손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입은 소리를 찍어내는 틀이자 생명을 불어넣는 밥의 입구가 된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들어가는 밥과 나오려는 소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밥을 먹을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온전히 들어가야 할 밥과 오롯이 나와야 할 소리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면 무척 낯설어진다. 난 그날 이후로 목구멍에서의 이 어색한 조우를 정리했다. 밥은 밥대로, 소리는 소리대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는 밥을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는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다하는 편이다. 누군가는 이 일을 고상함이나 침묵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기상 캐스터의 하얀 입김이 바람에 날리고, 아나운서가 한파주의보라고 여러 번 강조하던 12년 전 겨울. 아이들이 남긴 밥을 국에 말아 먹으며 날씨는 좀처럼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는데,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컥 복받치는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밥을 부둥켜 끌어안았다. 목에서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못하고 밥과 울음이 섞여 그만 무덤이 되고 말았다. 죽음이 이물감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날 내 목구멍에 걸린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마치 기억의 저편에서 발신한 부고장처럼 무언가 서글픈 마음이 도착하고야 만다.

사람이 쓰러지면 의지도 쓰러지려나. 두 노인만 사는 집, 욕실에서 쓰러져 바둥거리는 남자를 일흔이 넘은 여자가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우나.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은 이미 바닥이 되었을 테니. 119에 신고를 한 뒤 두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기지만 어깨가 문턱에 걸리고 만다. 욕실 바깥으로 간신히 머리까지 내놓았을 때, 남자가 컥컥 숨을 내뱉는다. 팔다리가 뻣뻣하고 말이 굳어버리고 정신이 흐릿하다. 곧이어 어깨가 들썩인다. 발작을 하는 남자를 그렇게 뉜 채 여자가 한 일은 주방으로 가는 것이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그릇에 밥을 담아 아침을 차린다. 그날 엄마의 모습은 내 심연 속에 오래 박혀있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감추고 싶은 그 일이 왠지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부유물처럼 떠오른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숨이 점선처럼 끊어져갈 때, 여자는 생명의 환대를 받으며 뜨거운 밥을 욱여넣는다. 남자가 꺼져가는 삶의 터널을 지나 마지막 목숨을 삼킬 때에도 여자는 목구멍 안으로 생명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퍼덕거리던 두 발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림이 잔잔해지면 들뜨던 어깨도 가라앉기 마련이다. 그날 엄마와 아버지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에 있었다. 꺼져가는 눈동자 위에 밥을 먹는 여자의 모습이 각인되고 남자는 눈을 감으면서 여자의 모습을 덮어버린다.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채 밥을 넘길 수 있을까. 누가 한 사람의 죽음을 구경하며 밥을 삼킬 수 있을까. 누가 죽음이 밥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의 밥은 '죽어가는 사람'의 배려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마지막 정성이다. 살아 있는 한 살려야 하는 노력이 죽음을 잠시 눈멀게 한다고 믿고 싶다. 불현듯 가버린 아버지가 사뭇 아쉽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엄마의 태도 또한 가슴에 슬픈 미련으로 남아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날의 그림 한 장이 내내 가슴을 미어터지게 만든다.

엄마는 서둘러 정리했다. 외투를 골라냈고 신발을 모았다. 책과 서류들을 재활용 상자에 쌓았으며, 돋보기와 노트, 시계는 서랍에 보관했다. 정리하다가 다시 흐트러뜨리고 그러다 다시 담아내기를 반복한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르진 않았다. 수북이 담긴 밥그릇을 바라볼 때면 엄마가 원시적인 인간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음식보다 먹이에 충실한 한 마리의 동물처럼 보인다. 꺼져가는 삶 앞에서 죽음을 반찬 삼아 먹이를 먹던 암컷인데 무엇이 두려울까. 한낱 배를 채우는 먹이일 뿐 그것은 사랑을 키워내지 못했다. 나의 목에 걸린 밥과 울음소리는 여태 무덤으로 서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밥은 산처럼 쌓여간다. 입은 더할 나위 없이 벌어져 먹이를 낚아채는 짐승 같다. 하필 왜 밥이었을까. "어떻게든 살렸어야지!"

남자의 떨리는 눈동자,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만 됐다며 무언의 부탁을 한다. 응급실에 자주 실려 가던 터라 몸과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탓이 크다. 오래전 남자와 여자는 약속을 했다. 누구든 먼저 쓰러지면 그냥 보내주기로.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겨서 여자를 나무라던 참이다. 그날 뒤늦은 약속이 지켜졌다. "곧 갈 테니 먼저 가." 귓속말로 남자를 배웅하고 땀에 젖은 몸을 끌고 간신히 주방으로 기어간다. 새끼들 때문에 조금 더 살아야 하는 여자는 저혈당 증세를 억누르기 위해 밥 한 숟가락 삼키고, 남자의 꺼져가는 눈빛을 바라보며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고.

엄마 입에 밥이 들어간다. 거울을 보듯 마주 앉아 나도 입에 밥을 넣는다. 눈처럼 하얀 밥이 그 겨울의 슬픔 위로 쌓인다. 아픈 말들을 잠재우고 조용히 밥을 먹으면 밥알이 알알이 구르며 마음을 읽는 시간이 다가온다. 말을 하지 않아도 하루만큼의 태엽이 감기고 끈끈한 다정함이 서로에게 도달한다. 엄마 입이 열리면 내 입도 크게 열려서 오롯이 밥의 시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엄마 가슴에 묻힌 아버지에게도 내 심연의 무덤에게도 살고 싶다는 의지가 닿아서 하루씩 살게 만든다. 밥을 먹으면 신기하게도 내일이 온다는 믿음이 쌓인다. 엄마를 필사하면서 알게 된 하나.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 당선소감

낯선 곳을 좋아한다. 골목이나 지하철, 소란스러운 장터는 순간의 점령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곳에서 만난 이름 모를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낯설다는 느낌은 나의 테두리를 선명하게 그리며 방관자에서 관찰자로 이끌어준다. 순진한 표정과 손짓을 기록하게 만드는 그 하루를 누군가는 근사한 모습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칭찬은 글이 되지 못한다. 생각을 넓게 펼친 후 불필요한 곳을 도려내야 물고기떼처럼 손끝으로 사유의 문장들이 모여든다. 기름을 짜듯 고독을 견뎌야 진한 한 방울의 문장이 흰 바탕 위로 똑 떨어질 뿐이다. 매번 근사함에서 그치는 나는 사실 부지런하지 않다. 그래서 폭풍 같은 매질이 당도했을 것이다. 강아지 사료를 구입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멍하니 오래 서 있었나 보다. '계산할까요'라는 직원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네, 물론요. 빚진 글쓰기에도 곧 계산을 치르겠습니다!'

툭 튀어나오는 재채기처럼 고마운 마음 또한 참을 수 없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백연심 여사, 얼마 전 당신의 다이어리에서 가을을 배웅하는 문장을 읽었다. "안녕, 단풍아! 내년에 또 보자." 핸드폰에 엄마를 '백 작가'라고 저장한 일은 여태 자랑스럽다. 그리고 영원한 나의 팬들, 어떤 상황에서도 날 위해 별처럼 반짝이는 남편과 어른스러운 늘이, 친구 같은 준호 모두 고맙고 사랑한다.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이지엽 교수님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 교수님들과 문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큰 용기를 주신 매일신문 심사위원 허상문 선생님, 유인실 선생님, 주인석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글 앞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제자리걸음이었으니 엄살은 이제 내려놓겠다. "하늘 너머에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연민과 사랑이 존재한다." 보후밀 흐라발의 이 말을 나는 믿는다. 그러니 더 이상 희망 운운하며 슬퍼하지 않을 테다. 계절과 팔짱을 끼고 휘파람을 불며 낯선 길과 글을 오래 사랑할 것이다.

〈약력〉

-서울 출생.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 독서지도학과 석사 졸업.

-단국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2017년 경기도명소예술공모전 대상 수상.

-2018년 《열린시학》 한국예술작가상으로 시 등단.

-2018년 단국문학상 신인상 수상.

-동인지 '그리움은 손바닥을 닮았다', 시집 '너의 추락을 모의하는 동안'

- 심사평

응모된 460편이 양적으로는 작년과 유사하지만, 질적 수준은 예년보다 능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특히 젊은 세대의 지원이 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그동안 수필이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라는 점 때문에 응모자의 연령대가 대체로 높았다. 연령과 형식에 갇히지 않은 젊은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갑다.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을 변형한 글, 지식을 뽐내는 글, 일기 형식의 잡문도 허다하다. 수필은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문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사에서는 소재의 형상화와 사유, 분명한 주제의식, 감동과 재미를 포함한 문학적 완결성을 살폈다.

심사위원들의 손에 최종적으로 남은 세 작품을 두고 긴 토의를 거쳤지만,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해 낭독까지 했다. 각각의 작품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붕, 예술을 얹다'는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유가 깊었으나 다소 주지적이라는 점이 안타까웠다. '빨래, 그 긴 고해성사'는 빨래를 인생의 고해성사로 풀어낸 점이 특이했으나 옷 이야기가 길어져 감동이 약했다. 당선작인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은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면서도 가장 소중하고 숭고한 밥과 숟가락의 의미를 통하여 삶과 존재의 의미를 밝힌다. 숨이 끊어지는 사람 곁에서 우걱우걱 밥을 먹는 이유,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무심한 듯 공유하는 아이러니, 그리고 화해와 공감까지 긴 시간 동안 숟가락은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최소단위로 형상화되고 있다. 최소를 잊고 최대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늘날 귀감이 될만한 글이다.

밥은 하루만큼의 태엽이고 끈끈한 다정함이라는 작품 속 말처럼, 삶의 최소단위인 한 숟가락의 밥이 더욱 밝고 풍요로운 새해를 만들길 염원해본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모든 응모자에게는 다음을 기약하며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허상문 유인실 주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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