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한 무식쟁이들 / 곽흥렬 

 

아내와 함께 주택가 언저리의 한 음식점에 들렀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건너편 손님들이 화기애애하게 술자리를 갖고 있다.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왁자그르르한 분위기에 이끌려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로 귀가 모아졌다. 세상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늘 어김없이 듣게 되는 낯익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글쎄 우리 와이프가 말이야. 어제 말이야~"

'그러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디를 가건 비교적 젊은 사람들, 그것도 특히 먹물깨나 먹어 보이는 축들 가운데서 자기 아내를 두고 '우리 와이프'라고 부르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을 참 '유식한 무식쟁이들'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세상의 아내 된 이들은 자기 남편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 허즈번드'라고 하지 않는데, 왜 남편 된 자들 중에는 자기 아내를 지칭할 때 예의 "우리 와이프", "우리 와이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일까. 확적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자신이 물 건너 온 말 좀 할 줄 안다며 은근히 뽐내고 싶어 하는 묘한 심리가 딸려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싼 밥 먹고 뭐 그리할 일이 없어서 내가 그들을 두고 유식한 무식쟁이들이라고 쓴소리를 하겠는가. 그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어 가운데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하나같이 비하되거나 저속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레지'는 본시 영어 '레지스터(register)'에서 유래된 말로, 손님을 모시고 주문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나라로 건너와서는, 손님을 접대하며 차를 나르는 여자를 홀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어인 '마담(madame)'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 낱말은 원래 귀부인이라는 고상한 뜻이었으나 우리 언어에 동화하면서 술집이나 다방 등의 여자 주인을 일컫는 말로 격하되어 쓰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보이(boy)'는 '뽀이'로 된소리화 하면서 호텔이나 유흥가 등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젊은 남자를 낮추어 부르는 용어로 바뀌었는가 하면, 창녀를 뜻하는 속어인 '갈보'는 1931년에 나온 영화 <마타 하리>에서 여주인공이었던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가 몸을 파는 여인 역을 열연한 것으로부터 연유하여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콩글리시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서 짧은 영어 단어는 알아 가지고 자기 아내를 두고 "와이프", "와이프" 하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 무식쟁이임을 세상에 떠벌리는 일인지,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 소리로 들먹여지는 그들의 아내로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격이 낮은 여인이 되어 버린다. 애당초 '와이프'라는 영어 단어를 몰랐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유식이 오히려 무식이 되고 마는 꼴이다.

《밀린다왕문경》​에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쓰이는 외국말 가운데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비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다면 자기 아내를 두고 '와이프'라고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 부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결과적으로 저급한 여인이 되어 버리니 그런 말을 쓰는 이들은 어쩌면 자기 아내한테 모르고 짓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우리말의 이러한 특성을 깨닫고 난 뒤에도 그 말버릇을 고치지 않고 남 앞에서 여전히 "우리 와이프", "우리 와이프"하려나" 그것이 무척 궁금해지면서도, 이런 소소한 일에까지 오지랖 넓게 참견을 하려 드는 내가 좀 유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닌지 적이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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