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발자국에서는 언어의 숨소리가 났다 / 송마나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집시처럼 떠돌다가 버려진 고향 집에 들어서 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지는 여러 해가 되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들쳐보았고, 페이지를 메울 단어들을 입속에서 웅얼거리곤 했다. 책은 그녀의 발자국들로만 이루어졌는데 어느 누구도 절뚝거리며 거리를 누비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여자는 바람에 불려 다니는 나뭇잎처럼 거리를 떠돌았다. 머리에는 늘 꾀죄죄한 모자가 덮여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상복인지 등산복인지 구별할 수 없지만 헐렁하게 온몸을 감쌌다. 키가 큰 그녀의 등은 굽었고,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그녀는 힘겹게 발을 들어 올리지만 발을 땅에 내려놓을 때는 더욱 힘겨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산이나 들은 물론이고 다리를 지나 듯 아파트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그녀의 발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안개처럼 스쳐가는 그녀의 발자국에서는 언어의 숨소리가 났다.

그 여자는 환영을 뿌리고 다니는 유령 같아서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알 수 없다. 자신을 나타내는데 왜 그렇게도 인색할까? 그 여자의 헤어진 옷자락 속에는 얼마나 슬픈 눈물들이 감춰 있는 것인지. 이따금 눈물 방울방울이 대낮의 빛 속으로 탈출하여 그녀의 눌러 쓴 모자를 밀어 올려 얼굴을 슬쩍 드러나도록 한다. 그 얼굴 위로 불쑥 알 수 없는 고통이 지나가는 것 같다. 다시 그 여자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문자들을 안고 책의 페이지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인가? 정확한 지표 없이 더듬거리다가는 돌아다닌 궤적을 기록할 수 없을 텐데…. 영감이라는 문학 기계는 고장 나는 법이 없지만 작동하는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이미지는 덩어리로 굳어 버릴 것이다. 무생물에게 피가 돌게 하여 생명체로 태어나도록 하기에는 아직 정신이 부족하다. 그녀의 발걸음에 텍스트는 삐걱거렸고 밤들 위로 밤들이 쌓였다.

그 여자가 이집트의 기제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밤이면 우주의 혼령들이 아우성치는 어두운 내실의 틈 구멍으로 몇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시리우스 별빛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는 유한한 세계 너머로 펼쳐진 광대무변한 세계를 그리워했다. 가없는 하늘이 펼쳐진 우주의 근원에서 터져 나오는 모성의 빛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을 버리지 못했다. 이윽고 파르스름한 별빛이 피라미드 내벽의 틈새를 비집고 쏟아져 수많은 밤을 걸어 다녔던 그녀의 발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그녀의 하얀 발이 파르르 떨렸다.

그 여자가 그리스 남쪽에 있는 이오스 섬으로 가는 배에 올라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플라톤이 뮤즈의 여신이라 칭송했던 사포가 태어난 레스보스 섬에서 그녀는 훌쩍거렸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무덤이 있는 이오스 섬에서도 눈물을 흘렸는가?

사포는 레스보스 섬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살았던 여류 시인이다. 사포의 시는 일반 대중과 남성 시인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교사들에게 모범 문장으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사포의 재능을 시샘했던 낡은 역사는 그녀에게 동성애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레즈비언(lesbian)’이란 단어는 그녀의 고향 레스보스에서 유래하여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로 굳어졌으니, 그녀는 사포를 껴안고 울었다.

그 여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봉인된 문을 열고 들어가 호메로스 앞에 섰다. 문학가 대부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빚을 지고 있다. 이오스 섬의 동쪽 끝 산마루에 있는 호메로스 무덤은 그의 얼굴이 조각된 작은 석판만이 한 평도 안 되는 마당의 돌담장 위에 초라하게 얹어있다.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뿐, 맹인 호메로스는 윤슬이 반짝거리는 그 바다마저 보지 못한다. 그녀는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호메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퀴클롭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인사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가 울면서 지나가는 장소는 물과 땅의 가장자리, 세상의 끝과도 같은 곳이다. 산과 하늘,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다. 침묵의 바다 앞에 종이 제방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으로 부유한다. 침묵으로 영글어진 눈물방울과 환영이 서로 스며들면 살갗 밑의 주름 속에 침전되었던 생각과 욕망이 주름을 찢고 일어선다. 종잇장은 위임받은 인간의 피부다. 오늘날 종이는 식물로 만들어졌지만 이전에는 양피지였다. 피부는 태어나면서부터 태곳적 조상들의 언어와 한숨, 몸짓과 탄식이 그물망으로 표면에 펼쳐진다. 아장아장 걸음을 옮길 때쯤이면 피부에 써진 언어들은 수정되고 왜곡되고 덧입혀진다. 종이 위에 쓰인 옛날의 필적들에 슬그머니 새로운 단어들이 끼어들고 뒤섞이는데 그녀는 그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이윽고 그 여자가 어느 청명한 가을날에 인사동 네 거리에 나타났다. 파란색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그녀의 첫 책 《하늘비자》가 들렸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없는 것인가. 하늘 비자를 받았으니 구름처럼 그만 하늘로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조금밖에 책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몇 번의 방문, 몇몇 이미지가 고작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울음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지 않았다. 이미지들이 내포하는 기호를 유동적이고 다항적인 세계로 팽창시키지 못하고 한 줌의 밭뙈기 안에 쑤셔 넣고 말았다. 번개가 땅으로 내려칠 때 뿜어져 나온 단어로 우렛소리를 살려내지 못했다. 언어의 껍질을 벗겨 그 내면에서 샘물을 끌어올려 숲을 푸르게 하고, 들판을 황금물결로 넘실거리게 하는 것을 망각했다. 겨우 길들이 꼬불꼬불 뻗어나갔다. 창공으로 몇 마리 새들만이 간신히 날아올랐다. 이미지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낱말들은 비틀거렸다. 바람이 하얀 종이 위에 부서져 널브러진 단어들을 흩날리고, 그녀의 발밑으로 시간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꿈속에서 그 여자가 태양이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사막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뒤로 멀어지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 실비 제르맹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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