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치잡이 / 이치운

 

 

내 고향 소리도에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섬의 생김새가 솔개가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솔개 연鳶자를 써서 '연도'라 부르기도 한다. 여수항에서 배를 타고 2시간 30분가량 바닷길을 따라 가면 남면의 가장 끝자락에 힐링섬 소리도가 있다. 올해도 나는 마음 먼저 그곳으로 달려간다.

 

내가 열다섯이던 해의 일이다. 추석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쌀밥이라도 먹이려면 바다에 나가 부시리를 잡아야 했다. 나와 아버지는 늙은 호박에 갈치 몇 조각을 넣고 끓여낸 국에 밥을 몇 술 뜨고 점심으로 고구마 으깬 보리밥을 챙겨서 일찌감치 선착장으로 향했다. 함께 가기로 한 동네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멀리 무인도 까치 섬을 바라보았다. 까치독사가 많이 살고 있어 붙여진 그 섬에 우리 섬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는 날이 있다.

 

그 날은 까치 섬 주위에 물때가 좋지 않았다. 배를 타고 한 시간 여 동안 낚싯줄을 끌면서 섬 주위를 돌았지만 부시리는 구경도 못했다. 아버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뱃머리를 돌렸다. 바람이 없어 파도가 잔잔한 날씨면 어른들은 종종 나에게 배의 키를 잡아보라고 했다. 신나게 파도를 가르며 삼십여 분 달렸을까. 하늘에 갈매기 떼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갈매기가 있는 곳에는 항상 먹이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아는 나이였다. 갈매기 떼가 군무를 추며 하늘을 휘감을 때 바다색깔은 암초에 해조류가 붙은 것처럼 유난히 검은색으로 빛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갑판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아부지 저기 좀 보랑께, 저것이 뭐다요." "무슨 일이다냐?", "기계소리 죽이소". 다급하면서도 묵직한 말이 할아버지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내가 칠십 평생 고기를 잡아 묵고 살았지만 저런 건 처음 본당께." 바다위에는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검은 바다를 향해 몸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그럴 때 물 속에서는 멸치 같은 작은 물고기 떼가 수면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어 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먹이 활동을 하거나 포식자로 부터 위협을 느낄 때다. 아마도 바다 밑에서 무슨 사단이 난듯하다.

 

엔진은 멈추었지만 배는 천천히 숨죽여 물속의 시커먼 물체 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다름 아닌 멸치 떼였다. 멸치 떼는 큰 포식자들의 위협이 지속적으로 가해지자 습성처럼 몸을 똘똘 뭉쳐서 스스로의 방어벽을 만들었다. 나는 쪽바지로 멸치를 퍼 담자고 했다. 할아버지는 입술에다 손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보내셨다. 기가 차다는 듯 멸치 떼를 지켜보던 두 분은 혹시 모르니 낚싯줄을 넣어 보자고 하셨다. '이맘때가 되면 종종 삼치가 멸치 떼를 따라 이동 한당께', 할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눈에는 멸치 떼의 둘레가 족히 40미터쯤 되어 보였다. 배의 엔진이 다시 돌아갔다. 배는 멸치 떼에서 오십 미터 이상 멀찍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낚싯줄을 넣을 때 엉키지 않도록 육십여 미터나 되는 삼치 채비를 꼼꼼히 점검을 했다. 뭔가 잡힐 것 같은 기대감에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삼치나 부시리 같은 회유성 어종은 '채비'가 다르다. 낚시 원줄 약 오십 미터에 목줄은 십여 미터로 전체 길이가 육십 미터 쯤 된다. 낚싯줄은 납을 가운데 배를 갈라 쇠줄을 넣고 망치로 두드려 넣는다. 낚싯바늘은 납작한 플라스틱 바에 끼워져 물속에서 회전을 하면서 반짝이는 빛이 물고기를 유인한다. 삼치는 강한 식성을 갖고 있다. 워낙 시력이 좋아 빠르게 회유하면서도 멀리 있는 먹이를 포착 할 수 있다.

 

"술 넣어 보거라."라는 아버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줄에 달려있는 낚시를 던져 넣었다. 또 멸치 떼가 수면 가까이 떠있으니 낚싯줄을 깊이 넣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았다. 육십여 미터 중 절반정도 낚싯줄을 풀어 넣고 고물(후미)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지만 묵직하고 팽팽한 낚싯줄을 통해 전해오는 입질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았다. 감각이 발달된 사람만이 그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약간 그리고 아주 조금씩 당겨지는 듯한 '미세한 느낌'이 왔다. 드디어 한 마리가 걸렸다. 장갑을 낄 겨를도 없이 맨손으로 원줄을 잡아당겼다. 목줄을 잡아당길 때쯤이면 손끝에 전해오는 묵직함으로 물고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오늘 이 녀석을 잡고 못 잡고는 오로지 목줄을 잡아당기는 기술에 달려있다. 물고기와의 치열한 심리싸움이 시작된 셈이다. 큰 물고기를 끌어 올릴 때 힘으로만 잡아당기면 물고기의 아가리가 터져버린다. 물고기가 힘을 쓰고 버티면 조금씩 목줄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런 밀당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물고기를 수면위로 끌어 올려야 한다. 목줄을 단단히 틀어잡았다. 물고기는 갈지자로 요동친다. 휘리릭 츠, 휘리릭 츠 잡아당기던 목줄을 다시 풀어준다.

 

목줄을 풀어주고 잡아당길 때는 오로지 물고기와 나만이 존재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이 된다. 엔진소리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내게 조언해주는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순간 낚싯줄이 손바닥 피부를 파고들면서 짠물이 갈라진 틈사이로 스며든다. 상처가 쓰리고 아프기 시작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순간이다. 내가 첫 놈을 놓치면 먹이를 쫓아 따라붙던 무리들이 달아나기 때문에 반드시 잡아 올려야 한다고 배웠다. 피 터지는 싸움을 하면서 성질머리 고약한 놈을 어르고 달랜 지 십 여 분이 흘렀을까. 마침내 허연 배때기를 뒤집으며 물 위로 떠오른다. 삼치였다. 몸집은 날씬하고 은색을 뒤집어 쓴 것처럼 반짝이는 피부에 머리에서 꼬리까지 검은 점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대가리는 화살촉처럼 생겨 성질이 급하게 보인다. 눈짐작으로 거의 1미터 쯤 되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손바닥이 쓰리고 아팠지만 심리전에서 이긴 쾌감으로 가슴은 뿌듯했다. 내가 한 마리 잡아 올리자 배에 있던 나머지 두벌의 낚싯줄도 서서히 풀어졌다.

 

해질 무렵이라 낚시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낚싯대에 달려 있는 고무줄이 팽팽해진다. 삼치입질이 시작되었다. 배는 계속해서 멸치 떼 주위를 저속으로 선회한다. 삼치도 군중심리가 있다. 한 놈이 물고 늘어지면 다른 놈이 달려와 다짜고짜 물고 늘어진다. 두어 시간 동안 백여 마리를 잡았다. 이쯤 되면 배 안은 ‘삼치 풍년’이다. 한 달 동안 잡을까 말까 하는 양을 두 어 시간 만에 잡았다. '삼치 노다지'이다. 배의 엔진도 만선의 기쁨으로 북을 치듯 통통통 우렁차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만선을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허연 윗도리를 벗어 깃발을 만들어 이물(선미)에 꽂았다. 삼치와 붉은 노을을 가득실어 묵직해진 배는 파도를 가볍게 가르며 포구로 돌아왔다.

 

삼치 잡던 두 분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지만, 광에는 아직 주인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삼치 채비만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덩그라니 놓여 있다. 올 추석에 나는 까치 섬으로 부시리를 잡으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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