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똥을 생각하며 / 김정태

 

 

개별적인 밥에서 똥에 이르는 길은 어둡고 험난하다. 때로는 그 여정이 심란하고 조급하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한때, 먹구름처럼 스멀스멀 다가오던 삶이, 어느 순간부터 거덜 난 것이 점점 확실해져 갔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는데 별 수 없이 해가 지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게 된다. 짜증과 분노, 배신과 원망, 미움이 뒤범벅이 되던 시절이다. 취해버린 자의 무책임하고 가엾은 정서는 나오는 대로 지껄여대면서 욕하고 악다구니하다가, 비실비실 집으로 향하는 찬바람 이는 새벽길에서, 똥이 되지 못한 것들이 제 들어간 곳으로 도로 기어 나왔다. 겨우 제 길로 찾아간 것들만 아침에 똥이 되어 나왔다.

 

이런 날, 스스로에게 씌워지는 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최고조에 달한다. 가엾고 슬픈 똥이다. 앉아서 마시던 장소도 가물거리고 마구 지껄였던 말들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가늘고 무기력하게 나온다. 참으로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똥이다. 한 끼 식사로 어린아이 똥을 맛있게 먹던 개도 이제는 없지만, 개 입맛에도 맞지 않을 똥이다. 이런 똥은 더 이상 대지大地도 받아주길 거절한다. 밥과 똥으로 이어지던 대지의 순환 고리는 끊긴지 오래다.

 

그 시절, 밥을 넘기며 눈물겨웠다. 그 밥을 먹고 거덜 난 삶을 추슬러 가며 똥을 눌 때 또 혼자 눈물겨워 했다. 나는 지금도 흩어진 그날들의 시간이 슬프고 기막히다.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이 흘러 슬픈 똥과 남루한 똥을 이제는 누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 가며 날뛰고 공격적인 나의 똥도 안정을 되찾아갔고, 삶의 영원성 앞에 경건을 회복한 듯싶다. 그런데 밥에서 똥으로 가는 여정에 엉뚱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입원하시고 사흘째를 맞는다. 밥을 앞에 놓고 그저 바라만 보신다. 저 밥을 씹어 식도를 넘기고 긴 터널을 내려보내 똥이 되어 나와야 살 수가 있단다. 주치의의 지엄한 말이다. 그런데 넘기질 못하고 있다. 넘어가는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다. 정해진 시간마다 찾아와 묻는 간호사도, 대답 궁한 나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식사는 얼마나 하셨나요?”

“오늘 변은 보셨어요? 소변은 몇 번?”

내가 간호사한테 죄지은 것도 없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밥과 국 쪼끔, 변은 아직, 소변은 반 컵 정도……”

입원한지 닷새째 되던 날, 기어들어간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변을 쪼끔 ......”

 

변을 보면 물을 내리지 말고 말해 달라는 담당 간호사의 당부가 있었다. 득달같이 달려가 간호사를 데리고 와 변기 안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늙으면 똥도 노혼老昏이 오는가. 반쯤 풀어진 똥이 정신을 놓은 듯 앉아 있다. 공격적인 냄새도 없다. 간호사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똥 사진을 뭐 하시려고......?”

“의사 선생님 오시면 보여 드려야 돼서요.”

헛웃음이 나오며 어머니의 가여운 똥 앞에서 또 눈물겨웠다. 평생 밥을 만들기 위해 험한 길을 걸어온 한 노인의 삶 끝자락에, 똥을 만들기 위한 것 역시 힘든 여정이지 싶다. 힘겨웠지만 순결한 노동의 대가로 자식을 위해 밥을 만들었다면, 그 자식에게 보일 수밖에 없는 힘겨워하는 똥도 순결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의학자 허준(1539-1615)이 사람의 똥오줌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냄새 맡아 보고, 찍어 맛을 보고 그 대단한 <동의보감>의 대변大便 편을 적었다고 하듯이, 현대 의학을 공부한 의사도 환자인 어머니의 똥을 들여다볼 모양이다. 잠시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간호사에게 한마디 건넸다.

“색깔 좋고 예쁘게 찍어주세요.”

 

‘모든 똥 중에서 최상위의 포식자인 인간의 똥이 가장 더럽고 구리다.’라는 어느 동물학자의 연구 결과를 책에서 보고 많이 놀랐다. 내 짧은 소견으로도(소견 일뿐 나는 똥을 연구해 본 일은 없다.) 맞는 말인 것 같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시골에 살며 소는 늘 접해 본 동물이다. 유년의 시절에 만나던 소똥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때의 대부분 소들은 들과 산에서 나는 것들만 먹고 살았다. 풀을 많이 먹는 여름의 소똥에서는 풀냄새가 배어나왔다. 겨울의 소들은 마른 풀을 먹어서 그런지 여름 것보다 질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마른 소똥은 오븐에서 방금 구워낸 빵 같고 숯처럼 불을 한 번 붙여 놓으면 꺼지지 않고 잘 탔다. 벼 그루터기 툭툭 삐져나온 겨울 논의 얼음판에서 놀다가, 발이 시려오면 밭둑이나 야산 아래에서 소똥을 주워 모아 불을 지폈다. 후후 불며 대중없이 불장난을 하다가, 설핏한 저녁노을에 놀라 불붙은 소똥을 하나씩 들고 팔을 돌리며 저녁밥 연기 오르는 집으로 내달렸다. 내 정서의 바탕에 자리 잡은 이런 풍경은 유년의 아름다움 중 상위권에 속한다.

 

지금의 대량 축사에서 키우는 소들의 똥은 그 지독한 냄새가 공격적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사료를 먹고 똥을 눈다. 쉽게 마르지도 않는 질척한 똥은 설령 마른다고 해도 불을 붙여 손으로 들고 돌릴 수 있는 똥이 아니다. 개별적이지도 않고 계통도 질서도 없이 서로 뒤섞여 널브러져 있다.

 

입원한지 열흘을 넘기며 이제는 간호사가 어머니의 뒷일 한 것을 사진 찍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께서 밥은 얼마나 드셨는지, 화장실은 몇 번 다녀왔는지 만 일지에 적어 놓는다.

“밥 벌어먹기도 힘들지만 주는 밥 먹고 똥 만들기도 그 못지않구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와 한마디 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이순을 넘긴 아들이 철없이 밥과 똥을 생각하며 눈물겨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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