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에서의 깨달음 / 정목일

 굴을 판다는 것은 깊이, 몰두에 대한 집념의 행위가 아닐까. 자신만의 자각 공간, 사색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며, 영원 세계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실크로드 기행 중에서 사막 속의 막고굴에 가서 '굴'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어둡고 음침한 굴이 깨달음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황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과 사막 속에 펼쳐진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보았다. 폐쇄와 밀폐 공간으로서의 굴이 아닌 깨달음의 신성 공간으로 보였다.

세계 최대 불교미술의 유적지이자 보고寶庫로써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중국의 막고굴은 오랜 풍우에 빛이 바래고 마멸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굴속에 불상을 안치하고 흙담 위에 벽화를 그린 서기 366년부터 14세기까지 1천여 년 동안 남겨진 1천여 개 동굴의 작품들 중, 현존하는 것은 4백여 개에 불과하다.

왜 굴을 파서 불상을 안치하는 형식을 택하였을까? 사막에서 불상을 제작하여 풍화작용에 훼손당하지 않고 강렬한 태양 광선으로부터 색상을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석굴이었다. 막고굴은 신앙과 예술을 위해 영혼과 의지를 불태운 숭고한 현장이었다. 몇 년에 걸쳐 하나씩의 굴을 판 다음 어떤 불상을 안치할 것인가, 또 어떤 내용의 벽화를 그릴 것인가를 구상하였다. 이 일은 일생의 구상이자 구도 작업이기도 했다. 불상을 안치하고 벽화를 그리는 일에 화가들은 일생을 걸었다.

깨달음의 경지를 터득한 부처의 모습을 인간이 어떻게 조형해 낼 것인가. 그 일에 매달린다는 것은 곧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다. 불상을 만들기 위해선 그 자신이 부처가 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굴을 파면서부터 작가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마음속에 무상무념의 경지와 부처의 미소가 떠오를 때까지 컴컴한 굴속의 바닥에 꿇어앉아 면벽수도面壁修道를 했다. 막고굴의 미술 제작자들은 명작을 남기고 싶은 사소한 열망을 지우고, 오로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영혼을 불태웠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서 마침내 자신도 하나의 굴이 되고자 했다.

어두컴컴한 석굴 속에 들어가 그곳을 신성 공간, 이상 세계로 구현하려면 구원 의식과 맑은 영혼을 불어넣어야 했다. 작업 시간은 2,3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이 걸렸다. 붓을 멈추고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 오랫동안 방황했던 길에서 알고 싶은 질문에 스스로 해답을 얻어 깨달음을 체득하고자 했다.

굴 안의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다. 안으로 햇빛이 비쳐들지 않아 청동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끌어들여야 했다. 어둠 속에서 굴 안으로 조그맣게 반사된 빛을 따라가면서 벽화를 그려갔다. 어둠 속에서 청동거울로 반사시킨 빛을 따라 섬세하게 그려가는 극사실화 작업은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부분적으로 그려서 전체적인 구도에 맞추어야 하므로 빨리 진행시키기 어려웠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거울로 끌어들인 희미한 빛에 의해 그려지는 작업 과정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영감으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신의 계시를 받지 않고는 허투루 만 년 동굴 벽에 붓질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동굴 속으로 들어온 빛을 따라 벽화를 그려갔다.

막고굴의 작품들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비춰주는 부분만을 볼 수 있다. 미술작품들은 일일이 그 작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대부분 무명無名이다. 그들은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굴 하나씩에 작품으로써 한 채의 집을 짓고, 깨달음을 얻고 떠나려 했다. 명예가 아닌 완성, 완성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를 원했다. 그들은 이 일에 일생을 바쳤다.

막고굴 불교 미술작품들은 마음과 깨달음으로 보아야 할 숭고한 영혼의 예술품이었다. 사막의 실크로드 위에 피운 구도와 자각의 꽃이었다. 어둠 속에 청동 거울로 끌어온 빛으로 벽화를 그려놓은 미술 장인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어둠에 묻혀서 일생을 걸고 굴속을 아름다운 깨침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어두운 막고굴에서 언제 환한 깨달음의 마음 꽃을 피워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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