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와 마음무게 / 곽흥렬 

 

몸무게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든다. 야위었다는 게 분명 잘못은 아닐진대, 꼭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따금 날씬해서 좋겠다는 소리를 건네 오는 이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듣기 좋으라고 위로를 하려 드는 것 같이 생각이 되어 기분을 완전히 돌려놓지는 못한다.

신체에 대한 강박관념이 나를 몸무게 절대 신봉자로 만들었다. 체구가 듬직한 이들은 생선 병에 걸리지도, 그리고 평생 죽지도 않을 것처럼 여겨져서 은근히 부럽기까지 하다. 질병이 몰래 접근해 오다가도 그 우람한 몸집에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어쩌다 집채만 한 바위라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같이 건장하던 사람이 한창 살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그런 사람이 죽다니.'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마음은 끝까지 부인을 하려 든다.

동창회나 계모임 자리 같은 데서 은근히 뽐내듯 몸무게 이야기를 늘어놓길 좋아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하, 어제 사우나에 갔더니 글쎄 며칠 새 체중이 3kg이나 늘었지 뭐야. 이거 아주 큰일 났어."

주워섬기는 당자야 푸념쯤으로 하는 말일는지 모르겠으되, 듣는 나로서는 어쩐지 은근한 자랑처럼만 여겨진다. 이런 사람을 보면 대체 화제로 삼을 것이 얼마나 없기에 시시콜콜 몸무게 타령이나 하고 있는가 싶어 참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경험칙 상, 그런 축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들은 어디 가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때 빼고 광낸다는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아, 지극히 현상적인 것에 충실하려는 그 존재의 가벼움이여!

지난날 몸무게가 하나의 자랑거리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는 듬직하고 풍만한 체구가 부유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달덩이 같다느니, 사장 소리 듣겠다느니 하는 표현이 최대의 찬사로 통했다. 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의 이야기다.

예전에 비하여 내남없이 몸집들이 겁나게 비대해졌다. 이젠 웬만큼 나간다 싶으면 거의 0.1톤을 오르내린다. 만일 불어나는 몸무게에 비례해 마음무게까지 따라 무거워진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평생 가 봐야 가망이 없는 위인이 되고 말겠다. 요즘 세상의 화두가 단연 '살빼기'인데, 나는 도리어 '살찌우기'이니 해 보는 넋두리다.

이렇게 몸무게가 늘어나면 마음무게도 따라 늘어나야 하는 것이 자연한 이치일 터이다. 그러하거늘,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저울눈의 수치를 높여 놓건만 마음무게는 오히려 갈수록 바람 빠진 풍선처럼 졸아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대체 어인 까닭인가. 삼겹살로 불어난 공포의 몸무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지구의 하중만 잔뜩 늘려 놓을 따름이다. 차라리 소, 돼지였으면 육 보시라도 하지….

몸무게 운운하는 사람 말고 마음무게 운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지금처럼 동물들 사회 같이 대화보다는 주먹부터 앞세우는 일도 훨씬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법전에서의 수다한 조문條文 가운데 주먹 자랑하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항목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차지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몸무게 달 듯 마음무게 다는 저울은 없을까. 그런 저울 하나 있다면 매일같이 몸매 관리하듯 '마음매' 관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으련만….

나는 원체 육신의 생김생김이 회오리바람 불면 쓸려갈 듯 바짝 건조한 형상이니 몸무게로는 이미 틀려버린 몸이다. 그러기에 마음무게나 빈약하지 아니하도록 차곡차곡 늘려가려고 결심을 다잡으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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