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나 / 허창옥

연수교육 중이다. 오디토리움이라는 대형 공간에서 천팔백여 명의 회원이 강의를 듣는다. 오전 아홉 시에 길게 줄을 서서 등록을 하고, 열 시에 시작해서 오우 다섯 시쯤에 끝난다. 여기 모여 앉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거의 꼭대기라 할 수 있는 선배다. 일흔, 나. 현역이다.

첫 시간의 주제가 ‘2형 당뇨병’이다. 나의 친애하는 30년 지기 친구 2형 당뇨병. 귀를 바짝 세우고 듣는다. 대학교수의 강의는 매우 학술적이나 내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화면에 비치는 췌장이나 간의 모형들과 도표, 원어들이 흐릿하다. 백내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내 탓이다. 앞자리 친구들, 옆자리 후배 다 졸고 있다.

몇 가지 건강식품이, 넘치게 건강한 강사의 격정적인 강의로 소개된다. 무심하게 듣는다. 중식 후에 병태 생리와 약리에 전문적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강의가 몇 시간 진행된다. 본격 졸음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수학 선생님의 교탁 두들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뜬다.(이 나이에도 지각 꿈, 시험 꿈을 자주 꾼다. 어휴!) 요즘 말로 ‘유체이탈’하여 아득히 떠돌기만 하다가 일정이 끝난다. QR코드나 찍고 간다. 교육 과정, 이수履修했다.

녹보수가 잎사귀들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늘어진 이파리들이 쪼글쪼글하다. 자주 잎사귀들을 쓰다듬거나 눈인사를 하는데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몹시 더웠다. 이른바 ‘대프리카’의 위용을 자랑하듯 체감온도 40도를 오르내렸다. 힘들었던 게다. 화원 주인마다 물 주기의 주기를 다르게 말한다. 물 주기가 잘못되었나. 너무 더웠나. 식물에 무지하면서 욕심 때문에 사 모은 화초들, 모두 고생한다. 녹보수에 물을 듬뿍 주고 영양제를 꽂았다.

그리고 며칠. 녹보수는 반쯤의 앞들을 털어버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서 있다. 떨어진 잎들이 바닥에 쌓여 있다. 정말이지 시원하다. 가지들은 힘이 솟아서 팔을 벌리고 있다. 절체절명, 셀프 가지치기다.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이다. 나무의 치열한 생명력이 내게로 건너온다. 벅차다.

녹보수는 지금 건강하다.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도 아까워서 가지치기를 못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나무가 스스로 해냈다. 엉성하지만 멋지다. 나무를 들이던 날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화원 주인이 대박나무라 하였다. 대박! 그 ‘대박’이란 말에 신명이 났다. 함께한 세월이 길어지면서 정이 깊어졌다. ‘대박’은 속으로 품고, 그 이름 그대로 ‘녹보수’라 부른다.

나무의 잎사귀 털어내기를 보면서 나를 들여다본다. 일흔 살이 된 나를 응시한다.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느라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와서 실눈이 되어간다. 뺨은 쳐지고 팔자주름이 선명하다. 목에 잔주름도 생겼다. 손등에는 푸른 핏줄들이 돋아 보인다. 뭐 참을만하다. 그보다 더 좋지 않은 건 몇 가지 질병이 들러붙어서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버틴다는 것이다. 이 또한 방도가 없다. 일흔, 이게 나다.

육신의 것은 그렇다 치자. 수필 「마흔의 봄」을 쓸 때 나는 내가 어른인 줄 알았다. 어림도 없는 착각이었다. 그간의 삼십 년 세월이 어리석음으로 점철되었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이제 정말 어른이구나, 아니 어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런 자각이 왔다. 너그러운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속이 간장종지만 하고, 적당히 비겁하며, 자주 화가 나는 나이만 어른인 사람이 되어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 밤엔 엊그제 고민, 오늘 걱정, 내일 근심까지 뒤엉켜 밤새 뒤척인다. 일흔의 나는 편안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 편안해야 너그러워질 텐데.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놓쳐버렸다. 무엇인가 잔뜩 옴켜쥐고 있느라 달리 향유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놓쳐버린 게다. 허망하다.

나무의 잎 털어내기, 그리하여 건강하게 살기. 저 가련한 나무도 스스로 잎을 떨구어 낼 줄 아는데 나는 이날까지 보태기만 해왔다. 그게 물질이면 부자라도 되는 건데 형체도 없는 근심들만 우글거렸으니 TV 광고처럼 비워서 ‘유쾌 상쾌 통쾌’해지자. 비워내서, 놓아버려서 편안해지자. 품이 넓고 너그러운 어른이 되자. 남은 생, 소원이 있다면 자신과 타자에게 다 편안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현역이라고 했다. 스물셋 약국 근무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공백 없이 일했다. 쉬면 아프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나. 그런 말들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일흔 생일날에 문득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수교육 중에 닭 졸듯이 졸면서 그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정리하고! 남은 날들 유유자적 늙어가자. 녹보수처럼 훌훌 털어내고 편안하게 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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