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선명한 그 노트 / 배귀선

 

 

자판을 두드린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 속 삶이 미명처럼 어렴풋하다. 옛날 같으면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써야 할 희미한 내용이 단 몇 번의 자판 두드림으로 명료해진다.

깜박거리는 커서를 밀어내며 어휘가 줄을 선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연상 작용이 차례를 기다릴 때도 있고 쏟아져 나올 때도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나올 때는 무엇부터 받아 적어야 할지 모른다. 그럴 때는 잠시 눈을 감는다.

감동의 순간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길들여지지 않은 감정이 불쑥불쑥 돌출되던 중학교 2학년 때쯤의 초록빛 선명한 노트 한 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과목별 노트 한 권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내게 널따란 비닐 커버의 노트는 엄청난 동거였다. 겉장부터 초록빛이 선명한 그 노트는 흑백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오롯이 내 것이라는 점과 세련된 표지에 매료된 나는 언제나 그 노트를 끼고 다녔다.

밤에는 막연한 그리움이라든가 천장에 드리워진 우울 같은 것들을 노트에 적었다. 그렇게 지샌 날이면 밤새 쓴 이야기들을 되짚어 읽다가 왠지 모를 슬픔 때문에 가슴 저밀 때가 있었다.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 것은 시구詩句들이다. 지금처럼 손쉽게 시집이나 소설책을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그 시절, 나는 사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곤 했다. 쇼윈도 너머 단란한 가족사진이 부럽기도 했으나 사진에 인자된 ‘가화만사성’리라든가 경구 같은 문장이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네모난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사진사의 동작은 예술가처럼 보였고 그 옆에서 ‘펑’ 소리와 함께 터지는 플래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지나며 내 관심은 쇼윈도에 진열된 단발머리 여학생 사진으로 옮겨졌다. 고백하건대 이성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흑백사진 한쪽에 새겨진 시구를 읽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설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옮겨 적었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가 선물해준 초록의 노트에는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비롯 이런저런 시편들이 채워져 갔다. 시라는 이름으로 내 마음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초록의 사춘기 노트는 여물어가는 시간을 따라 말랑해져 갔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나는 학교가 파하면 가을을 따라 걸었고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철길을 동경했다. 만남보다는 이별을, 이별보다는 슬픔을 꿈꾸었다. 센티해진 치기는 또래 친구들을 저만큼 밀쳐놓았고 서너 살 많은 형들과 어울리게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시했다.

취업이라 할 것도 없는 남루한 막노동판에서 돈벌이를 하면서부터는 서점을 기웃거렸다. 내가 번 돈으로 제일 먼저 구입한 책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빙점 》이었다. 내 기억이 굴절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무리 똑바로 걸어도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발자국처럼 사랑 또한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랑은 아픈 것일까, 작품 속 주인공 요코는 기울어진 삶과 사랑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다. 작품 속 주인공 요코는 기울어진 삶과 사랑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사랑은 늘 여운을 남긴다.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결미에 희망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남긴다. 사랑의 한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암시가 그것인데, 수십 년 전 읽은 이 소설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는 것은 등장인물 간 섬세한 심리묘사가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이후로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습관처럼 과자 봉지에 인쇄된 성분을 읽었고 출퇴근 길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다. 이 같은 난독亂讀증은 부모님 병수발 내내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읽기는 나에게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기에 사랑을 알게 된 시간이었으며, 그 외롭고 쓸쓸한 암실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읍내의 작은 사진관 유리에 얼피친 시구를 베끼던 시간들 때문에 문학이라는 암실의 방에서 지금 이 글을 운명처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한 곳만을 응시하는 사진이 되어 문학의 쇼윈도에 갇혀 있는 것이다. 영원히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쓴다, 내 문학의 기원인 마음 속 초록노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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