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를 위한 독백 이귀복 

 

 

대릉원의 겨울은 적막했다바람이 불자 늙은 소나무는 마른 솔방울 두 개를 떨어뜨렸다나는 걸음을 멈춘 채 그 솔방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무심하게 떨어지는 솔방울이라도 신라의 것이라면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하필이면 왜 지금인가천년의 시간을 견디어 겨우 솔방울로 맺어진 사랑 하나가 그렇게 나를 기다렸던 것일까그냥 돌아서기엔 마음이 아려 솔방울 두 개를 천천히 주워들었다거칠지만 따뜻한 솔방울의 감촉긴 세월 동안 품어온 사랑을 더는 어쩔 수 없었던지 솔방울의 마른 비늘 사이로 슬픔이 배어난다.

 

솔방울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대릉원 안뜰로 들어서니 옛 무덤들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평화로웠다불현듯 나도 아무 무덤이나 한 자락 베고 세상사 모두 잊고 낮잠이나 들고 싶었다경주에서는 굳이 무덤이 아니어도 낮잠 잘 곳은 많다남산자락도 아늑하고 경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백률사 입구그 사면 석불의 발치쯤도 좋다그러나 한 군데그곳만은 곤란하다영묘사 절터 그곳에서의 낮잠은 위험한 일이다아름다운 여왕의 혼령이 주술을 걸어 잠든 사람을 꼼짝없이 먼 바다로 내쫓는다면 큰일이 아닌가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않는다면그리하여 스스로 불타오르지만 않는다면 인자한 그녀가 우리들 가슴 위에도 금팔찌 하나쯤 놓고 갈지 어떻게 아는가.

 

여왕 선덕에게는 많은 설화가 따라다닌다모란꽃에 향기가 없음을 예언하였고옥문지에서 우는 개구리울음으로 매복한 적병이 있음을 간파했던 여왕그리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던 지혜의 여왕육신은 이승에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도리천을 날았던 선덕그러나 그녀도 군주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다자귀를 향한 연민을 통해 나는 군주로서의 선덕보다 여린 심성을 가진 여인 덕만을 읽어내는 것이다.

 

사랑에도 계산을 들이댄다면 먼저 사랑한 사람이 어리석고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죄인이다그런 의미에서 여왕 선덕에겐 어떤 죄도 물을 수가 없다그녀의 바람은 온 백성에게 덕을 베푸는 인자한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지미친 거렁뱅이의 애인이 되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테니까그런 여왕을 비천한 신분의 사내가 감히 연모한 죄그리고 그 사랑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불귀신이 되어 서라벌을 태운 죄이 모든 것이 다 지귀 탓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귀도 가엾다세상사 그러하듯사랑에 대한 일도 권력을 가진 쪽이 유리한 법이다지귀란 녀석낡은 홑치마에 달거리 흔적이나 묻히고 히죽거리며 거리를 떠도는 년과 눈이 맞았다면 오죽이나 좋았으랴제 주재에 눈은 정수리에 붙었는지 비단 용포 걸친 지존의 여인을 사랑했으니 처음부터 그 사랑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던가.

오랫동안 여왕을 연모한 지귀가 그녀의 행차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가 백성들의 무리에서 뛰어나와

아름다운 여왕이여사랑하는 나의 선덕이여!”를 외치며 가마를 가로막았을 때 여왕은 지귀를 질책하지 않았다오히려 관리를 나무랐다.

 

나한테 온다는데 왜 붙잡았느냐?”

그것이 여왕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였다미친 사내를 저지하려던 관리만 머쓱하게 해놓고 여왕은 활리역의 걸인 지귀를 부드럽게 감쌌다그 후에도 여왕은 실수를 거듭한다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말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그래고마운 일이로구나!”

우주가 비어버린 듯 처연한 목소리서라벌이 모두 자신의 것이어도 인간 덕만은 고독했나 보다그때 여왕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지귀의 가슴에 불을 지핀 쪽은 오히려 짐()이었느니라.’

만일 자신이 가진 권력을 탐하는 사내가 목매달았던들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어줄 여왕이겠는가여인의 마음은 진실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서라벌의 상거지 지귀의 형형한 눈동자엔 오직 여왕을 사랑하는 열정 외에 어쩐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순간 덕만은 순수한 지귀의 눈에 풍덩 빠져 소박한 여인으로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통치자의 자리그 무거운 페르소나를 훌훌 벗어던지고 흰 머릿수건 눌러 쓴 아낙이 되어 지귀만을 위한 밥 한 끼를 지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여왕이 영묘사로 가고 있다반월성을 휘돌아 남천을 지나 영묘사 가는 길여왕이 탄 가마가 가볍게 흔들린다왕관에 붙은 곡옥 몇 개가 그녀의 이마에서 가볍게 떨린다언제 또 봄은 이렇게 깊었나주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개나리 진달래의 환장할 꽃빛시름 깊은 여왕의 가마 위로 백목련 꽃잎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진다.

덧없이 가고 마는 봄처럼 인생 또한 꿈 같은 것여왕의 허전한 마음을 지귀가 알 리 없지덩실덩실 춤추며 그저 가마 뒤를 따르면 되는 것을.

 

영묘사 가는 길 외로운 여인 덕만은 혼잣말로 읊조린다이 봄날 내 곁에 지귀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

내가 불공드리고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영묘사 법당에서 여왕이 기도한다고운 용포자락에 부처님의 가피가 소리 없이 스며드는데 목탑에 기댄 지귀는 단잠에 빠져든다여왕은 믿고 잠들어버린 그 모습이 천진한 아이 같다.

군주가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는 법지귀의 지어미로 살고 싶은 덕만의 속마음을 서라벌의 부처님은 모르는 척 태평하다겉으론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연민으로 아픈 마음은 부처님이 더하다가엾은 덕만이여사랑이란 허무한 봄 꿈 같은 것이니라다음 생에 몸 받으면 너와 지귀가시버시로 엮으리라나무아미타불아무아미타불.

 

잠든 지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왕의 눈빛이 흔들린다이윽고 자신의 살이 닿은 황금팔찌를 벗어 잠든 지귀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여인에게 팔찌란 어떤 의미인가덕만은 팔찌를 벗은 게 아니라 마음을 벗었고 영혼을 벗었다황진이가 이웃 총각의 주검 위에 비단치마를 덮어주었듯덕만은 지귀의 가슴 위에 모든 것을 놓았다.

 

지귀가 잠든 사이 여왕의 옷자락은 저 멀리 사라졌다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우매한 자신이 미워서 가슴에 놓인 팔찌가 기막혀서 가슴에 불이 일었다온몸이 불덩이다여인의 모든 걸 받고도 탈 줄 모르는 사내를 누가 사내가 하겠는가불길이 번진다온 서라벌이 시뻘겋다.

여왕이여이젠 아니 됩니다주저하지 마옵소서당신의 백성들을 화마에서 구하소서.

여인 덕만은 어디 가고 준엄한 군장 선덕이 서릿발처럼 외친다그녀의 목소리가 갈퀴를 세운 파도 같다.

 

지귀여 물러가라저 푸른 바다 건너.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나

온몸이 불로 변하였네

푸른 바다로 멀리 쫓아

보지도 친하지도 말 일이다.

 

대릉원의 솔방울 두 개를 쥐고 나는 한바탕 낮 꿈을 꾸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