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움직인 힘 / 이은화
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으로 읽는 세기
프롤로그-20세기의 키워드를 찾아서
시작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이 가기 위한 옳은 접근방법이다. 핵심을 알고 중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체를 살피는 공부법이 주효한 역사다. 많은 것을 알아서 재미있는 공부가 아니라 흐름이 이해가 되고 질문이 생길 때 흥미는 배가 된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찾아 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 시작을 찾아 유추하고 추론하는 시간이 즐거움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모르는 것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경직된 틀을 깨고 새로운 사실에 동의가 어려웠다.
경직된 틀을 깨뜨리는 데에는 통증이 있기 마련이다. 흑백논리처럼 완고한 경계를 갖고 있는 흑과 백, 선과 악, 참과 거짓처럼 부정할 수 없는 사고의 결은 틈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은 의심이 비집고 들어 갈 틈을 쉽게 주지 않는다. 오히려 명문화된 기술과 박제된 사고가 참이라는 그런 통상적인 궤도를 벗어나는 일에 도움을 준 것은 역설적인 문장이었다. 역설적인 문장은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리고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과 맥락도 없는 호응이 어색할 때도 있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렇게 새로운 생각과 태도로 움직이라는 신호로 정신적 체조는 시작된다. 요즘 필자를 붙드는 화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담은 침울한 현실 인식이다.
21세기는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시작의 전환점일까. 거리낌없이 가열차게 길을 만들면서 왔지만 동력을 잃고 발목을 잡힌 형국이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균열이 생기면 당황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점검을 해야 하는 시간일지 모른다. 서로의 자리를 고정시킨 채 멈추어 서서 주위를 살피게 했던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생각할 틈을 제공한 것을 혜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21세기는 시작부터 굉음으로 한 세기를 열었다.
동서 대립과 냉전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양극화의 실체가 드러나는 참담한 현장을 마주한 9·11테러(2001)는 시작이었다. 꼬리를 물고 터지는 사건의 배후에는 미국과 상대국이 있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구촌이 감당해야 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 벌어진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은 미국 본토의 첫 공격이라는 세기적인 기록을 남겼다. ‘미국의 역사는 9·11 테러 전후로 나뉜다.’는 정의는 빼거나 보탠 말이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불러 온 잔인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사상이나 이념이 모양새였지만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전쟁으로 다시 동서로 대립되는 긴 전쟁에 돌입했다.
세계전쟁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싸움이 아니라 많이 가잔 자와 덜 가진 자들이 다투는 전쟁이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물자를 공급하면서 특수를 누리는 국가가 탄생한 기이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시장을 키웠다. 전장에 엄청난 자본이 투자되고 물자가 생산되며 소비되는 전쟁이 개입한 경제흐름은 나라의 자본의 구조와 크기를 바꾸었던 그 중심에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이 있고 미국에 맞서는 세계가 있다.
세계를 끌고 가는 힘은 자본주의다. ‘근대화’의 다른 말인 ‘세계화’는 자의든 타의든 지구촌의 모든 나라들을 삼켰다. 자본주의의 명암을 살피지 못하는 사이, 보이는 수치와 결과로 주어진 눈앞의 황홀경에 취해 달려 온 20세기는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누구의 결과가 더 아름답고 큰가를 재며 능력을 평가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맹점인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면서 해결과제로 급부상하자 비로소 틈새를 발견하고 주춤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발생하고 스스로 힘을 키워 온 자본주의를 살필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관심이 아예 없었던 탓이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는 자본의 특성상 기존의 시장이 잠식되어지면 새로운 시장을 찾아 자산을 확대하려는 성향이 더 많은 문제를 키웠다. 자본주의의 맛을 본 19세기 유럽은 영역의 확대를 위해 신흥강대국들은 차례로 식민지 확대와 탐색에 나섰다. 자본의 시장 확대가 낳은 것은 ‘제국주의’라는 괴물이었다. 탐욕으로 뭉친 제국이 만든 영토는 시장이었고, 시장의 확대는 이익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의 속성인 ‘경제제일주의’가 잘못된 정책임을 알고 지적한 젊은 학자 칼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술된 경제학 분야의 저서인 《자본론》이 20세기를 주도한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비판한 마르크스의 질주는 또 다른 사생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낳는다. 한사람의 현실비판적 사상이 시작한 20세기는 소용돌이 속으로 돌입하게 된다.
20세기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독재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이들이 닮은 모습으로 등장한 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와 무솔리니다. 세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이이고 민족말살과 독재정치를 앞세운 탄압과 폭정으로 나란히 전범이 되어버린 인물들이다. 스스로의 사상을 파시즘이라고 불렀던 무솔리니의 마지막을 닮은 사회주의의 끝을 소련이 보여 줄 것을 통찰력 있는 인물이 예고했지만 귀 기울이지 않았던 20세기는 시회주의의 환희와 자본주의의 비명 속에 극과 극을 오가며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완의 묘비명-칼 마르크스 의 삶 속으로
세기말인 1999년에 영국의 BBC에서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1위에는 칼 마르크스였고 2위는 아인슈타인, 3위에 뉴턴과 4위에 찰스 다윈, 5위 토마스 아퀴나스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업적이 뚜렷한 과학자도 아니고 종교계의 성인도 아닌 사상가인 칼 마르크스의 선정이 의외다. 많은 사상가를 제치고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선 사상을 제창한 칼 마르크스가 여전히 위대하다는 칭호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영국 런던 외곽의 하이게이트에 위치한 칼 마르크스의 묘비에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오직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뚜렷하다. 그의 혁명적 일성과 그에게 환호하고 뒤를 이었던 자들을 독려했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말이 그의 삶과 정신을 대변하는 문장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엥겔스와 함께 쓴 <세계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철학에서 심리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사상가였다. 철학자 헤겔의 영향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했으며, 경제학 분야에서는 ‘잉여가치설’에 영향을 준 아담스미스가 있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의 영향을 받아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시하면서 마르크스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자본주의를 꿰뚫어 본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의 행보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지인 엥겔스(1820~1895)*를 만나면서 힘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마르크스는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파리에서 평생의 동지가 될 엥겔스를 만나 1848년 <세계 공산당 선언>을 함께 발표하기에 이른다. 1849년 영국으로 망명한 마르크스의 가난한 생활을 엥겔스는 10년 동안 경제적으로 도왔다. 마르크스는 산업현장에서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을 가난과 위기에서 구하려는 열정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곁에서 그의 사후에까지 그의 사상을 책임지고 유고를 집필한 사람이다.
《자본론》은 1867년 1권이 출간되었고, 2권과 3권은 마르크스가 죽은 뒤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엥겔스에 의해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발간된다. 당시 일을 쉬지 않는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고, 일을 하지 않는 자본가들은 투자만으로 큰 부를 일구는, 산업혁명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찾으려했던 결실인 《자본론》은 150년 넘게 나라마다 빠짐없이 추천도서로 그 이름을 올리지만, 한국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 불온서적인 금서였다. 민주화운동 이후에 규제는 풀렸지만 여전히 《자본론》을 읽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을 짙은 책이 되었다. 볼 수 있는 자유와 사상적인 생각까지 제어 당했던 잿빛 서울의 봄이 지나는 시기였다.
이들이 등장한 이래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았고 그들이 말하는 성공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의한 혁명’이어야 성공이라는 비현실적인 사상적 토대는 그들 스스로 이룰 수 없는 형이상학적 목표임이 증명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누구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었으며 혁명가로 불리는 이들 중 누구도 프롤레타리아는 없었기 때문이다.
구)소련을 비롯한 지구촌의 1/3이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장이 되는 20세기는 동서로 양분되는 격렬한 전쟁터로 변했다. 하지만 20세기가 저물기 전에 세계 공산주의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정작 이 참담한 실험결과지는 칼 마르크스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의 사후 절친했던 조력자인 엥겔스의 추도사에서 “마르크스에게 반대자는 많았으나 개인적인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살아 있을 것이며, 그의 저서 또한 그럴 것이다.”라는 그의 추도사는 아직은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가 기초한 사상의 성과는 실패작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남아 있겠지만 끝까지 보탤 수 없는 한 줄이 있다면 그가 일군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실패로 끝났다는 한 줄일 터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세계사상사의 과정을 읽는 방법론에서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자본주의의 비평만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온전하게 해석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제고함으로서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부단히 대항해 나갈 것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비평정신만은 지금도 유효하다.
사상적 토대와 이론만으로 완전할 수 없었던 그의 사상을 비판한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마르크스주의는 반증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정하겠지만 노력으로 그들의 이념을 반증할 수 없다며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들의 역작 《자본론》은 여전히 사상적 이념을 기초한 대작으로서의 면모는 잃지 않았다.
그를 성과를 따로 두고 살펴보아도 그는 열정이 있는 학자였으며 비판의식이 뛰어난 당대의 석학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자본주의는 허점투성이의 불공정한 제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런 열정과 애정을 가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를 자본주의를 보완하고 시대에 맞는 제도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연구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주어졌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간파당한 자본주의의 본질-멀어진 자본주의의 갱생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 《자본론》에서 자본의 본질과 구조를 직시했으며 분석하고 파헤친다. ‘자본은 자기 증식을 행하는 가치의 운동체’로 자본을 정의하고 사회에 집중적으로 투하한 화폐는 유통하는 과정에서 보다 큰 화폐로 되돌아오는 자본주의가 이윤과 잉여가치를 우선하는 사회구조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통찰력은 비정상적인 역기능으로 자본주의사회의 발전을 두고 볼 수 없는 열정으로 바뀌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에 들킨 자본주의의 민낯이었다.
자본이 증식하는 생리는 돈이 돈을 굴리는 은행에서 드러난다. 돈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투자만으로 증식을 하고, 돈은 주식이라는 시장에 쏟아 붓기만 하는데도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착한 하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일하지 않아도 자본은 자기 증식력만으로 얼마든지 거대한 자본을 소유할 수 있는 막대한 식욕의 거대공룡이 되어. 자본이 자본을 생산하는 토양이 완성되었다. 빈부의 격차를 자신의 능력 차이와 신분 차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이러한 지적은 당대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비판과 지적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실패한 이론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날카로운 지적은 지금도 날을 세우고 있지만 사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을 밟고 있다. 그가 실패한 것은 자신의 이론으로 세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패이지 자본주의의 본질을 비판이 잘못된 것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패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맹점이 가려졌던 이유는 대항마로 세우려했던 공산주의와 무너진 사회주의가 실패한 때문이지 자본주의가 완전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가 조성되면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경제생활이었다. 자본이 축적되며 사회가 몸집을 키우는 동안은 문제점을 모르거나 지나쳤기도 했겠지만 사회적인 안정을 이끄는 힘을 얻는 도구로서의 자본을 무시할 수 없었던 사회구조도 한 몫을 했다. 자연발생적인 힘을 인위적인 힘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시도가 무리였다. 명석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간과한 것은 욕망이 일군 사회와 진일보 해 온 사회의 역량을 가볍게 본 것이다. 제도적인 힘과 사회의 단결로 바뀔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한 확신과 욕망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문제점으로 드러난 ‘빈부의 격차’에 대한 반감이 큰 탓도 있을 터였다.
20세기는 여러 방면에서 용감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팽창한 자본주의의 잠식에 눌린 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예견한 사회주의가 봇물처럼 밀려들자 환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 교만해진 진영, 바꿀 마음이 없는 자본주의는 잔인해지기 시작했고 이론적으로 확신에 찬 사회주의는 세력을 확장해가면 머지않아 세계가 공산화 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세계와 충돌하면서 20세기 전반기에 지구촌은 불구덩이(제1,2차 세계대전)를 지나게 된다.
한 진영에서는 스스로 이룬 근대라는 면류관에 취해 있었고, 집단 이성의 결과라고 믿었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힘이라고 믿었던 배경이 만든 불의 고리였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참혹한 결과였다. 한순간에 이념과 동경만으로 만들어 낸 운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사회주의의 본질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는 거대한 동력을 오랫동안 지닌 굳건한 메커니즘을 지녔다. 사회주의가 밀어닥친 결과는 참담했다.
역사는 이성의 힘으로 본질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중세시대에 이성적인 규휼과 제도로 욕망을 억제하고 제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인간의 억눌린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분출하게 만들었다. 욕망은 얼마든지 좋은 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을 이끈 동력이다. 물욕을 억제해서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와 타인을 위한 배려가 필요했던 교훈을 잊은 대가는 컸다.
욕망과 욕심의 끝은 어디쯤일까. 분명한 것은 내려놓는 시기는 놓치면 마음과 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인류를 움직인 원동력인 ‘욕망’이 멈추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는 자본주의다. 이미 오래 전 마르크스에게 들켜버리고 부끄러운 민낯을 보인 자본주의가 적이 아닌 이상 그가 우리의 힘이 되도록 적절히 길들이고 보완을 하는 것이 지금 뜨거운 불구덩이를 향해가는 지구촌의 선택지여야 하지 않을까. 실패한 사회주의는 얼굴을 바꿔 언제고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엥겔스 -1845년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면서 유물 사관을 제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