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 / 김순경

 

 

비만 오면 시뻘건 황토물을 토해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난 뒷산은 오랫동안 상처를 안고 있었다. 장꾼들과 농사짓는 동네 사람들이 날마다 산길을 오갔지만 산에는 관심이 없었다. 수많은 주검을 품고 있던 붉은 산에 도굴꾼이 몰려들었다. 성한 곳 없이 파헤쳐진 상처를 지켜보기만 할 때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만신창이 되었던 산이 점차 제 모습을 찾는다. 참호처럼 파헤쳐진 도굴 흔적이 빗물에 메워지고 널브러진 토기 조각들은 풀숲에 묻힌다. 다시는 제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였지만 천천히 봉합되고 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도질당했던 그곳에도 풀과 나무가 자랐다. 긴 세월 품고 있던 사연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시간이 겉모습을 되돌려놓는다.

유난히 붉은 뒷산은 고대국가의 고분군이었다. 수 세기 동안 무덤 옆에 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썼다. 내세의 부활을 믿었는지 강돌을 가져와 공간을 만들고 토기와 철제무기와 농기구를 함께 묻었다. 삼한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옛 무덤에는 까맣게 변해버린 곡식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넓고 큰 돌로 만든 적석총이나 석곽 고분에는 고급 장식품이나 유물이 많았지만 작은 무덤에는 토기 몇 점만 묻혀 있었다.

뒷산은 한때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낸 산은 털 빠진 들고양이처럼 군데군데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파 놓은 참호가 병정놀이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적 없지만 황토에 뒹굴고 포복을 하면서 해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토기 조각에 상처가 나면 흙이나 송진 가루로 지혈을 시켰다.

어느 날, 산에서 구슬을 주웠다. 그날 이후 소나기가 그치면 산으로 갔다.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는 구슬이 빗물에 씻겨나간 산비탈에 흩어져 있었다. 흙탕물이 산비탈을 타고 쏟아지거나 장마가 끝나는 날에는 많은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황옥석이었지만 투명한 수정이나 옥구슬도 있었다. 주판알 같은 육각 황옥석과 굼벵이처럼 생긴 푸른 옥석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고 앙증맞게 생겼지만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해 그냥 구슬이라 불렀다.

주운 구슬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의 의관이었는지 귀족들의 노리개용이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돈과 연관이 있는 개수와 크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작은 것은 건빵 한 봉지, 큰 것은 고급 카스텔라 한 개 값이었다. 과자를 사 먹을 생각에 주울 때마다 심마니처럼 큰소리를 질렀다. 체격이 작아 운동은 잘 못 하면서도 구슬은 유난히 잘 줍는 친구도 있었다. 구슬을 주울 때면 아이들은 눈빛부터 달라졌다.

가끔 구슬을 사러 오는 노인이 있었다. 납작모자를 쓴 노인의 복장은 남루했고 걸음걸이도 힘들어 보였지만 인상은 부드러웠다. 올 때마다 이장 집이었던 우리 집부터 들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찬이 별로 없는 밥상을 내왔다. 된장찌개를 먹을 때마다 몇십 년 전에 먹던 맛이라며 보리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마루에 걸터앉아 식사하면서도 늘 붉은 산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터 도굴꾼들이 몰려왔다. 토기도 돈이 된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쇠꼬챙이로 땅을 찔러댔다. 자고 나면 늘어나는 웅덩이 같은 도굴 흔적에 토기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돈맛을 알게 된 동네 아이들은 전문 도굴꾼보다 더했다. 남의 집 뒤란은 물론이고 마당까지도 무지막지하게 들쑤셨다. 담이 무너지든지 울타리가 망가지든지 관심이 없었다. 도시에서 공부하다 잠시 들렀던 마을 형님들도 합세했다. 매일 친구들과 놀았던 뒷동산은 비가 올 때마다 핏물 같은 붉은 흙탕물을 토해냈다.

중학교 때 역사를 배우면서 도굴이 무엇인지 알았다. 국사 선생님을 찾아가 그간의 일을 말씀드렸더니 방과 후 같이 가자고 했다. 무덤의 형태나 토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 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늦었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산에 도착하자마자 도굴 흔적을 찾아다니며 지금까지 보았던 것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선생님은 한참 둘러보시더니 파편 몇 개를 주워갔다. 무슨 대책이나 조치를 기대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국립대학교 박물관장에게 편지를 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수님이었지만 도굴을 방지할 수 있는 어떤 조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보았던 도굴 현장과 발굴된 유물 등을 설명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관제엽서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간단하게 몇 자 적혀 있었다.

"김 군에게. 지금은 예산이 없어 당장 발굴할 수가 없으니 김 군이 잘 지켜주기 바란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일본 유학 시절에 배운 측량 발굴 방법을 최초로 국내에 전파한 유물 발굴의 최고 권위자였다. 주로 국보급 문화재 발굴을 지휘하는 분이라 여기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고분의 장수 비결은 허술한 외형이다. 번듯한 봉분의 고분은 언제 누구에게 당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빈 무덤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허술한 무덤에서 귀중한 보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귀한 유물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폭풍처럼 도굴꾼들이 훑고 지나간 뒷산은 문화재 도굴 뉴스의 자료 화면으로 자주 등장했다.

민둥산이 제법 푸르게 변했을 때 느닷없이 발굴이 시작됐다. 날마다 대학 발굴단이 떼 지어 올라가면 이미 구석구석 다 파냈는데 무엇이 나오겠냐며 동네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군주를 상징하는 세 발 달린 청동 솥이 나오고 다른 지역에서 잘 볼 수 없는 수많은 철제 도구와 토기들이 쏟아졌다. 몇 차례에 걸쳐 발굴된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주변 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난다. 마음대로 들춰낸 진열장 속의 유물들이 다시 뒷산으로 돌아올 수는 있을는지. 그때 그 유물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김 군은 요즈음도 무시로 붉은 산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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