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가리개 / 김주선

 

 

프라하의 어느 길거리에서 소년 조각상의 성기를 움켜쥔 여인의 사진 한 장이 단톡방에 도착했다. 여행 중인 친구가 보내온 사진이었다. 설거지도 쌓아둔 채 아침드라마를 챙겨보던 여인들이 일제히 단톡방으로 모여들었다. 조각가 ‘밀로스 젯(Miloš Zet)’의 「청년(Youth)」이라는 작품이라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라는 둥 다녀온 사람마다 분분했다.

오래전부터 유럽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는 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관공서든 대학교든 길거리든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누드조각상이었다. 예술품을 숭상하던 시기의 조각상을 보면 단단한 근육질에 힘이 불끈 솟는 남성 우월적 몸매를 가졌지만 유독 작게 묘사된 성기는 지성적이고 절제적이라 하여 이상(理想)처럼 여겼다. 종교적 신념이 깃든 조각상과 달리 기념비적인 인물인 카프카를 동상으로 제작한 의도는 따로 있을까. 방어벽도 없이 길거리에 세워놓고 오고 가는 관광객을 모으는 구릿빛의 앳된 청년인 것은 분명했다.

하나의 상술이겠지만,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제주도의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과 비슷한 의미란다. 그 어디에도 ‘만지지 말라’는 경고문은 없고 오히려 중국인 가이드는 한 번씩 돌아가면서 손을 대고 사진을 찍도록 줄을 세우더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전해져 동서양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각상에 행하는 세레머니가 하나도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다나. 색이 벗겨질 정도로 그 부분만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다고 했다. 손사래를 치고 남사스럽다고 도망가는 일부 한국 여성을 빼면 어쩌면 「청년」이라는 작품은 행인들의 손때가 묻어 완성됨으로 유명세를 타고 도시의 명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줄을 서가며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오랜 세월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 빛이 나는 동상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로미오의 연인인 줄리엣의 동상 앞에서 남자들이 가슴을 만지려고 야단들인 것처럼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면야 민망함이 대수이겠는가. 종교적 의미가 깊은 교회라면 더 말할 나위 없고 성인(聖人)의 발이든 손이든 옷자락이든 축복과 행운에 갈급한 사람들이 얼마나 문지르고 소원을 말했을까.

그때 누군가가 맨해튼 월스트리트에 있는 황소상 불알을 만져봤다고 뜬금없이 농을 치기 시작했고, 증거 사진 두 장이 연거푸 올라왔다. 갱년기를 사는 여인들은 얼굴이 두꺼운지, 단톡방은 그야말로 손가락 끝에서 팝콘이 터지듯이 말풍선을 만들었다. 한 손으로 쇠뿔을 잡은 사진과 허리를 굽히고 황소 엉덩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쳐다보는 사진이었다. 뒷발로 걷어차기라도 할 듯 성난 소처럼 보였다.

증권가라 그런지 황소의 뿔과 그것을 만지면 큰돈이 생겨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유독 그 부분만 황금색이었다. 아마도 가이드는 귀 얇은 여행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황소상 앞에 줄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농 치는 말과 다르게 사진 속의 손은 부끄러움이 많은지 얌전하게 코트 주머니 속에 있었다. 한바탕 단톡방은 웃음바다였다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각자 위치로 설거지하러 간 모양이었다.

얼마 전, 태평동 시댁 근처 사진관에 폐점 공지가 붙었다. 바로 버스정류장 앞이라 차를 기다리면서 사진관 진열대에 전시한 대형사진에 눈길을 주곤 했다. 어느 집 가족사진과 아기 돌사진이나 백일사진이 주로 걸려 있었다. 돌사진은 소황제처럼 양단으로 된 전통 도령복을 입고 찍은 것과 발가벗고 찍은 우량아 사진이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나뭇잎 모양의 스티커 한 장으로 아랫도리를 가려놓아 궁금했던 차에 마침 문을 닫는다기에 물어보기로 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사장의 외아들 돌사진인데 오히려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모자이크 처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무화과 이파리로 몸을 가려야 하는 아담도 아니고 천사 같은 아기의 고추가 뭐가 부끄럽다고 가리개로 ‘가려라’ 했을까마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남녀 간의 대등한 관계를 내포하는 사회적 평등의 젠더 현상이라던가 뭐라던가. 그렇담 진즉에 사진을 치우지 나뭇잎으로 가려놓는 게 더 이상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성별의 차이가 불평등은 아니겠지만, 보기에 민망하니 그랬을 것이라 이해했다.

나뭇잎 가리개의 의미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느꼈던 불평등에 대한 보복은 아닐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원죄의 기원은 아담에게 있으니 무화과 이파리가 이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처럼 말이다.

18, 19세기경 아내를 물건 취급해 온 역사를 보면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내를 시장에다 내다 팔기도 했으며 영국은 아내를 양이나 소처럼 목에 밧줄을 걸고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니 얼마나 굴욕적인가. 이런 관행이 예술품에 그대로 녹아 있고 남성을 신처럼 완벽하게 조각해 놓은 조각상이 박물관에 넘쳐났다. 고대 로마의 가정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벌할 수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 풍조였다.

아마도 길거리에 세워진 「청년」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상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속설이 발생하는 요인 중에는 듣기 좋은 말은 무조건 믿고 싶은 심리 때문일 것이다. 아들을 낳는다거나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왜 그렇게 많은지 하다 하다 생식기를 다 만져보라니 격세지감이었다.

2010년경부터 우리나라는 딸 선호가 남아선호를 넘어섰다. 한 명의 자녀가 있다면 딸을 원한다고 할 만큼 국민의 66% 이상의 딸바보가 생겨났다. 대를 잇는 다거나 부양의 의무가 아들 몫이 아니기에 가부장 사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과거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절에 사랑방에 모인 집안 어르신들이 돌배기 손자의 ‘고추따먹기’ 놀이는 자연스러운 풍습이었다. 손을 갖다 대는 척만 하고 후루룩 먹는 소리만 요란했지, 사실은 애정 표현이었다. 그런 돌배기 아들을 은근슬쩍 사랑방으로 들여보내는 게 엄마의 자랑이고 특권이었다. 성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지금보다 성에 대한 보편적 윤리의식이 더 높았던 때라 하나도 민망하거나 불편하지 않았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카프카는 성장 과정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불화를 겪으며 영혼에 상처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내가 본 사진 속 소년 조각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가 연상되었다. 일정 부분 프란츠 카프카의 영향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세상은 변하고 속설은 또 다른 속설을 낳게 마련이다.

하얗게 벗겨진 청년 카프카의 상처 부위를 나뭇잎 한 장으로 가려 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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