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심呼心 / 라환희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는 사거리, 건너편 공원이 환하다. 바야흐로 봉두뫼가 절정을 이뤘다. 팬데믹의 회색빛 우울 속에서 맞은 세 번째 봄이다. 시절과 상관없이 공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후각이 예민해진다. 봄의 최면이 희망을 일깨웠을까 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나뭇가지마다 생명의 기운이 만개했다. 봄볕을 끼얹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로 농구코트가 반짝인다. 통통 튀는 웃음소리에 막 시작된 이 계절이 코로나 상황의 종식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회복의 바람이 부는 산책로는 휴일을 맞아 매화가 터널을 이뤘다.

예로부터 시대를 떠나 고고한 한사(寒士)를 자처한 이들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절개를 나눌 벗으로 여겼는가 하면, 설중매를 찾아 나서는 심매나 탐매행은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정신적 가치관을 미학의 기준으로 중시했던 옛 정서에서 매서운 한파를 이겨낸 매화가 고매한 선비의 애정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매화는 상춘의 길잡이다.

남녘의 매화 소식이 잔설 오가는 모퉁이를 돌아 전해지면 이곳 서해안자락에서도 봄 채비가 봉오리를 밀어 올린다. 하나둘 벙글어지던 꽃이 며칠 만에 만개한 걸 보면 올해 봄 마중은 더 서두른 것 같다. 위드 코로나의 불안을 잊고 매화나무 사이를 꿈꾸듯 걷는다. 잠시나마 제한적 현실을 잊게 하는 향은 무한한 설렘이다. 그리움에도 향이 있다면 분명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광장 건너로 향한다. 오늘따라 매창테마관이 운치를 더한다.

광장 초입 정자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난간마루에 앉으니 방금 지나온 공원과 광장 건너 한옥 풍의 테마관이 또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여유롭게 산책을 나온 게 얼마만 인지 기억도 멀다. 멈춤의 시간은 흥겨움이나 행복을 느끼는 감각마저 마비시킨 것 같다. 공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른 꽃잎 몇 날린다. 일상에서 놓친 것들을 향한 그리움이 밀려든다. 예전에는 지는 꽃잎 낱낱이 안타까움으로 와 닿던 때가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공으로 먹지 않은 나이 덕인지 꽃진 자리의 은유를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수굿해졌어도 낙화는 여전히 처연하다. 그중에서도 서둘러 핀 꽃들이 붉기 전에 지는 모습은 마음마저 애잔하게 한다. 발치에 내려앉은 꽃잎을 그리운 이름인 양 손바닥에 올려놓자 생각이 손금을 따라 번진다.

반려견의 목줄을 놓친 사람이 개를 부르는 소리가 고요를 흔든다. 화답하듯 꼬리치며 푸들이 달려온다. 불활성의 상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사람이나 이름이 필요하다. 이때 대상을 칭하는 어휘는 곧 대상을 대신한다. 하여서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인식의 세계로 이끄는 운송 수단인 이름은 힘이 세다. 이런 이름은 대상의 용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뜻을 담기도 하는데 ‘매창테마관’은 건물 용도, 즉 쓰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매창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광장 가장자리에 돋은 봄을 따라 천천히 건물로 향한다.

꽃이 한창인 공원과 달리 테마관은 한산하다. 주련처럼 걸린 매창테마관이라는 정보명과 달리 처마 아래 현판은 서정성 짙은 이름을 담고 있다. 완곡한 전서를 한 획, 한자 읽다 보면 마음이 먼저 동한다. ⟪梅窓花雨相憶齋⟫ 금세 이화우라도 흩뿌릴듯한 건물 이름이 한 여인의 생을 오롯이 담고 있다. 계해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향이라 불리던 조선의 기류 시인이 스스로 ‘매화 피는 창’이라 작호한 심정을 더듬게 하는 현판 앞에서 정한의 깊이를 헤아린다. 수백 년 시간을 건너도 닿지 못한 그리움이 꽃으로 피었노라고 모퉁잇돌 옆 매화가 한껏 희다.

기다림은 희망을 배면에 두고 자란다. 겨울의 중심인 동지에 이르러 매화 여든한 송이를 그려두고 날마다 한 송이씩 칠하며 봄을 기다린 옛 풍류처럼, 스스로 매화 핀 창이 되어 그녀는 촌은을 봄처럼 기다렸을 터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여인으로, 시를 쓰는 기녀로 살아내기가 녹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전시관에 거문고 소리 은은하여 정취를 더한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저도 날 생각는가” 건물을 나와 다시 한번 현판을 올려다본다. ‘매화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 ⟪매창화우상억재⟫ 그 풍경 같은 이름이 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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