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에 들다 / 황진숙

 

 

더는 갈 수 없고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목을 끌어 압도하지도 뒤쳐져 순종하지도 않는다. 황과 청의 따스함과 차가움을 동등하게 품어 온화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미완을 완성시키고 충만에 도달하는 색, 초록이다.

바닥을 기는 이끼에서부터 치솟은 나무의 잎사귀까지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에서 숲이 되고 편안한 보법을 위해 잔디가 되어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비상구의 불빛이 되어준다. 사람의 몸에도 초록이 들어 있다. 푸른 혈액이라 불리는 엽록소는 인체에 들어와 혈색소를 만든다. 엽록소의 마그네슘이 철분으로 바뀌어 혈액이 된다. 온몸을 돌고 돌게 만드는 귀한 색이 초록이다.

초록을 거닐다 보면 고요해져 마음이 열린다. 수피를 뚫고 나오는 새순의 연초록, 수풀을 내달리는 진초록, 푸름을 내려놓는 낙엽의 녹갈색,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방울의 청록색, 짙은 바다의 검푸른색 등 초록의 층위는 다채롭다. 정적이면서 동적인 파장으로 사위를 물들이는 풍경이 깊디깊다. 스르르 번지는 향내로 살그머니 내려앉는 소리로 몸과 마음을 돋워주는 빛깔이 초록이다.

내 곁에도 초록이 있다. 화려하다와 수수하다의 중간쯤, 외향적이지도 내향적이지도 않은 ‘담백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 ‘사랑한다’ 와 ‘치워뿌라’ 같은 오글거리는 말이나 센소리는 절대 입에 담을 수 없는 사람. 됨됨이가 요란하지 않아 누구와도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 무람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그 맛을 내어주는 단골식당처럼 동행한 그간의 세월에도 여전히 연록으로만 존재한다.

옆에 있으면 초록이 푸른 숨을 불어 넣듯 감정의 보풀이 가라앉고 말랑해진다. 가뭄 든 오이꼭지처럼 내 반응이 쓰디쓴 날, 그는 포도주를 내온다. 한 잔만 들이켜도 낯빛이 붉어지는 터라 그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내 말을 경청하며 고민을 대신하다 보니 서너 잔을 마시고 먼저 취해 버린다. 가물거리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뭉쳤던 마음이 풀어진다. 부드러운 입김으로 주절거리는 말들이 뒤엉킨 속내를 어루만진다.

타고난 음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건 그의 덕이다. 반 박자가 앞서는 나를 위해 노래방에만 가면 손으로 탬버린으로 박자를 맞춰준다. 함께 부르다 보면 노래 좀 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둥당거리는 선율에, 나부끼는 마음이 환하다. 서로에게 파도치는 초록이 참하다.

더러는 한결같은 초록이 답답하기도 했다. 제자리걸음인 딸아이의 성적에 열성적으로 몰입해도 모자랄 판에 아이를 존중하자며 지켜보잔다. 방관하지는 않지만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가, 외려 나를 옭아맨다.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는 일관성이 조금은 갑갑해진다. 직장에서 회식을 하거나 모임을 나가도 그는 좀처럼 일찍 들어오라는 재촉을 하지 않는다. 언제 오냐는 전화 한 통이 없다. 통제 없는 자유가 부럽다는 동료의 한 마디에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신혼도 아닌데,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하며 모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오는 그 집 신랑의 마중이 부러운 건 왜일까.

그럴 때는 그에게 다른 색을 입혀 주고 싶었다. 홍고추처럼 붉은 색을 씌우면 열정적이 될까. 숯처럼 까만색으로 채색하면 냉정해질까. 허나 열정과 냉정은 잠시잠깐이다.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고 냉정은 미적지근하기 마련이다. 뜨거움에 데이고 차가움에 지치면 은근함이 그리워진다. 모든 걸 빨아들일 듯한 강렬한 붉은 색과 암전에 들게 하는 어두운 검정색보다 온화한 초록에 시선이 머무는 이유다.

우물 같이 깊은 속을 가진 그라는 걸 알고 나서 늘 퍼 올렸던 것 같다. 두레박이 우물물을 가져가는 건 당연하니까. 명백한 건방짐이 아닐 수 없다. 홀로서기라는 낯선 단어를 수시로 들이대며 그의 마음을 무던히도 쪼갰다. 더해도 덜해도 있는 그대로 품어내는 초록이라는 둘레에 닿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역시, 초록으로 있기까지 마냥 다사롭지만은 않았다. 나와 한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속에 든 수천수만 가지의 색을 탈색시켰다. 꿈을 그리던 고집스런 무채색도, 일상의 소요로 얼룩진 흙빛도. 내 속이 되기 위해 그의 속은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으리라. 푸른빛으로 아물거리기 위해 접점에 선 나날이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색에 시선이 갈 수도 있겠다. 호기심에 두르고 걸쳐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지친 일상에서 초록이 휴식이 되어 주듯 나의 안식처는 그가 될 것이다. 초록으로 성성했던 이파리가 시래기가 되어 옅어질지라도 나는 깊은 맛을 음미하며 물들 것이다. 늘 그랬듯 초록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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