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잘 지내기 / 서숙

 

 

과 함께 치앙마이에 갔을 때였다. 훌륭한 커피 맛으로 유명한 한 카페에 수수한 차림새가 한국인임이 분명한 중년 여인이 홀로 들어왔다. 이어폰의 늘어진 줄과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이 전하는 분위기에 끌려 그녀에게 절로 시선이 갔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음미하고 난 후 그녀는 한 잔의 커피를 더 시켰다. 독서삼매 음악 커피 그리고 혼자 하는 여행. 멋있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는데 부럽지는 않았다. 딸을 보호자로 대동하고 여기에 와있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라고나 할까, 노마드는 당신들의 것, 나는 정주민.

기어이 떠나야만 할 절박성이란 것을 지니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된 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때에 마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펼쳐졌다. 2020년 12월 지금은 여행이 용이하지 않은 시간, 제대로 집콕의 시간이다. 여태껏 여행이 버킷리스트 단연 1등인 글로벌시대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코로나가 앞당긴 비대면 사회 상황에 아연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나도 물론 초유의 팬데믹에 위협을 받지만 비교적 한가롭게 이 정황을 바라본다.

남들은 세계를 무대로 여기저기를 헤맬 시간에 나는 집 한 칸이 온 우주인 양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다. 바 리케이트를 단단히 두르고 홀로 고요히 온전한 나만의 세상에서 평화로웠다. 원래 자발적 자폐의 경향이 있으므로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져야만 비로소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그것도 방구석을 찾아드는 성향이라 그만큼 내게는 집이라는 공간이 소중하다.

그런데 이즈음의 추세를 보니 어차피 재택근무나 홈스쿨링은 대세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렇게 되면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생활 패턴은 줄어들고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인구가 늘 것이다. 결국 내가 누려왔던 시대에 뒤처진 생활방식이 모든 이의 일상이 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일종의 연마된 기술과 자립의 의지가 필요하다. 자칫 외로움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겁내면 결국 밖으로 나돌며 시간과 마음을 탕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취미가 그래서 중요하다. 어떤 마음에 드는 광고 문구에 ‘유행보다 취향’이라는 카피가 있었다. 유행이 남 따라하기라면 취향은 나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취향에 맞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다면 몰입과 긴장의 시간이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마음 붙일 곳을 마련하면 술에 의존하여 현실을 회피하거나 헛되이 인간관계에 목을 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려면 타인을 내 삶에 끌어들이기에 급급하기 이전에 정작 나와 사이좋게 살도록, 내가 나를 납득시키고 기특해하도록, 내 마음에 흡족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 나만의 화두를 지녀 자문자답의 대화를 즐긴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디아몬처럼 그 누군가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내 안의 자아,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듯 또 다른 나를 대상으로 나는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고 나를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알아가며 깨닫는 즐거움 속에 사이불학思而不學, 학이불사學而不思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외부에서 오는 지식과 스스로 정리한 생각 사이의 조화를 찾아 미망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나의 환경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어떤 타인이나 제도로 부당한 결핍과 억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에 과감히 항거하고 방해물을 제거하는 지혜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유미적 취미로 인하여 나는 아름다움의 정체에 관심이 많다. 자연스럽게 그 대상은 예술작품이다. 시야를 넓혀주는 작품들을 감상하려면 그에 따른 공부가 선행해야 한다. 지적 영역을 넓히면 감수성의 깊이와 감각의 섬세함 및 예민함에 따른 안목과 소양도 절로 길러진다. 아름다움, 미적 판단에 대해 쉽게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어쩐지 맘에 든다.’ ‘그냥 좋다’는 애매한 경지에서는 일과성에 그치기 십상으로 길게 관심을 끌어가기가 어렵다. 확고한 판단력을 가져야 오래도록 취미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칼페파 타 칼라(καλεπa τa καλa beauty is difficult);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스마트폰 위에 넘치는 경구와 잠언들은 뭔가 한 말씀으로 인생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나아가 힐링까지 하려 든다. 멘토라는 사람들의 말 몇 마디로 힐링이 된다면 이 세상의 근심 걱정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들도 세상을 위로하려는 착한 마음인 것을 나도 모르지는 않는다. 삶의 위기에 봉착한 몇몇에겐 돌파구가 되어줄 수도 있으려나. 그래도 너무 쉽다.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영화 보기도 많이 줄였다. 객체에서 전체를 파악하고 가상을 통해 현실을 이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한때 경도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시들하다. 한 작가에 의한 스토리텔링, 시나리오에 의한 영상 등, 몇 사람이 펼치는 상상의 세계에 대한 한계에 회의감이 짙다. 그보다는 현실에 바탕을 둔 사회, 철학, 역사에 대하여 관심사가 옮겨갔다. 글쓰기의 영역도 그런 식으로 조정이 된다. 허구를 멀리하는 수필은 이런 나의 상태에 그지없이 적절하다.

그러나 역시 간혹 접하게 되는 드라마 영화 소설 연극은 감성을 터치하여 건조한 일상에 습기를 분무하는 기제가 된다. 일상의 건조함에 머물고 있던 때에 우연히 TV에서 슬픈 영화를 보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는 정도를 넘어 울음이 복받치는 것이었다. 마침 혼자였기에 버릇된 억제를 팽개칠 수 있었으리라. 영화의 결말이 어른거려서 심장은 아팠으나 실컷 울고 나니 확실히 정신이 맑아지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는 있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고로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눈물 흘리고 통곡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우울증 환자가 현저하게 줄었다고 한다. 정화작용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명랑함과 양명함을 유지하는 것이 내 삶의 모토이기 때문에 그 희망사항을 지 키기 위해 준비한 지침이 있다.

우선 과도한 미래지향은 현재를 망친다. 흘러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 사이에서 매 순간의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그로써 삶은 완결된다. 내일 내 앞에 펼쳐질 삶에 지나치게 연연하면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나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되는 대상은 과감히 보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행복하려면 관계를 과감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한다. 잘 안 풀리는 사이라면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다.

TMI가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라지만 나는 투 머치 아이네스(Too Much I-ness)로도 본다. 두 개의 TMI를 경계한다.

현대인은 정보 과잉과 자의식 과잉 사이에서 출렁인다. 실상 검색 만능의 시절이 고맙기 그지없긴 하다. 도서관 대신에 방구석에 머물러서 온갖 지식과 정보를 섭렵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심심할 틈 없는 콘텐츠 소비는 곤란하다. 서핑의 바다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다소 심심해야 ‘내 생각’을 채울 여지가 생긴다.

니체는 데카당스를 혐오했는데 그가 지적하는 퇴폐적인 감정은 청승과 자기연민이다. 이는 자기중심주의에 매몰되면 찾아오는 함정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나는 싫다. 부러운 것을 부러워하자. 그리고 내 손에 안 닿는 것은 흔쾌히 지우자. 나에게 없는 것을 순순히 포기해버리는 냉담함과 성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돈담무심(頓淡無心)의 경지를 추구한다.

미래지향 줄이기, 결단력 있는 관계 정립, 탈TMI, 이 세 가지만 명심하면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그러면 과욕 원망 조바심 억울함 등 사소한 감정의 낭비, 경박한 희로애락의 노출, 사고의 협소함 따위를 대폭 줄일 수 있다.

FAE (Frei Aber Einzeln 자유 그러나 고독). 고독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제대로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가. 생의 축복인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안테나를 장착하고 있으면 결코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애착이 가는 존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뿌듯한 행복감으로 충만하리니.

사랑이란 나를 잊고 나의 자리에 대상을 대신 들이는 것이다. 이윽고 애석하게도 언젠가 사랑은 끝나게 되고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사랑의 마법이 자신을 잊는 황홀이라면 자신에게로 맹숭맹숭하게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삭막한 일이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기다릴 줄도 안다. 먼 곳에서 오는 이를 마중하는 자세로 기다리는 가운데 더 잘 볼 수 있고 자세히 살필 수 있고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리움과 동경 가운데 비로소 나는 나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한다.

밀실과 광장. 홀로 유유자적한 밀실과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기다리는 광장을 오가며 내면에 거리낌이 없는 쾌청한 날이 찾아들기를, 나는 기대에 차서 아침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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