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싸리 회초리 / 김순남

 

 

더위를 피해 숲길을 걷기로 했다. 푸른 잎들 사이에 진분홍 작은 꽃들이 눈길을 끈다. 아! 싸리꽃이다. 2~3m 되는 싸리나무는 줄기 끝에 동글 동글한 잎과 작은 꽃송이들이 올망졸망 피어 숲과 잘 어우러져 있다. 나무 끝에 매달린 연한 싸리 꽃잎이 이렇게 고운 줄 미처 몰랐다. 꽃을 보고 있자니 “싸리 회초리 해 오거라.” 하시던 할아버지의 음성이 귓전에 맴돈다.

싸리나무의 쓰임은 다양하다. 아버지께서는 장마철에 잠시 틈을 타 싸리나무로 빗자루, 삼태기, 광주리, 다래끼 등을 만드셨다. 그뿐인가. 명절이나 제사 때 산적을 꿰는 꽂이, 말린 곶감을 보관할 때도 곱게 다듬어 썼다. 이렇게 친숙한 생활 도구로 쓰이는 나무를 할아버지께서는 왜 우리가 싫어하는 회초리로 사용하셨을까.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근검절약은 물론, 할아버지 말씀 한마디가 우리 가족들에게는 곧 법이자 생활 수칙이었다. 남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탐욕을 버리라 하셨다. 어머니는 혹여 삼촌들이 친구들과 휩쓸려 남의 과일나무에 손이라도 댈까 싶어 수확을 마친 보리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미처 줍지 못한 보리 이삭을 줍게 하시어 참외나 수박, 복숭아 등을 바꿔 오셨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다디단 참외를 먹을 땐 무섭기만 하던 할아버지 말씀도 달달한 참외 맛처럼 순하게 스며들었다.

삼촌들은 간혹 할아버지 앞에 불려가 천둥 같은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손수 나뭇가리로 가서 회초리를 찾아오라 하셨다. 종아리를 맞을 회초리를 스스로 골라 가져가면, 웬일인지 몇 번이고 다시 해 오라 하셨다. 방에서 숨죽이고, 삼촌들이 한시바삐 할아버지 앞을 벗어나길 바랐다. 회초리를 하러 오가며 반성의 시간을 더 갖게 하고자 하신 깊은 부성애父性愛란 걸 그때는 몰랐다.

어느 날 내게도 할아버지의 “싸리 회초리 해 오거라.”라는 우레와 같은 명령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늦어져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게 되었다. 완고하신 할아버지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을 손녀딸이 저지른 것이었다. 한 번도 말썽을 피우거나 잘못을 해 할아버지 앞에 불려가 목침 위에 서본 일이 없던 나지만 차후 벌어질 일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여지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초리를 하러 가야만 했다. ‘어느 나무가 할아버지 마음에 드실까. 아니 종아리가 덜 아플까.’ 생각하며 싸리나무 하나를 골랐다. 종아리를 걷고 목침 위에 올라서자 숨이 멎는 듯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찌 이리 무섭기만 하실까. 밉고 원망스럽다 못해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집안이 평화로울 것만 같았고 얼른 자라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도 들었다. “내려오거라.” 겁에 질린 가녀린 손녀딸이 애처로웠는지, 아님 손녀딸이라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철옹성 같은 할아버지께서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다짐으로 끝을 내셨다. 내 종아리는 멀쩡했으며 그제사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되고 그렇게 몸서리쳐지는 회초리를 손수 만들어 아들의 선생님께 보내게 되었다. 작은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여선생님은 열정과 아이들 사랑이 남달라 보였다. 가정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을 빌미 삼아 훈육을 따르지 않아 지도가 어렵다고 털어놓으셨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혼내달라고 참석한 어머니들 대부분은 선생님께 부탁하였다. 마침 어떻게 하면 연년생 사내아이 둘을 바르게 잘 키울지 고심할 때이다. 궁리 끝에 싸리나무 하나를 곱게 다듬어 손잡이에 아들 이름과 ‘사랑의 회초리’라 쓴 다음 아이 편에 보내드렸다. 내 아이가 잘못하면 회초리를 써서라도 다스려 달라는 뜻이었다.

이젠 가정이나 학교에서 회초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한둘의 자녀들에게 온갖 정성을 들이고 다양한 사교육을 시키지만, 정작 아이들의 인성을 바로 잡기는 점점 어렵다는 말들을 한다. 체벌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아이들을 훈육하기는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추보다 맵던 할아버지지만 진분홍 싸리꽃만큼이나 고운 추억도 있다. 객지에서 직장생활 하다 본가에 다녀갈 때마다 속주머니에 넣어두셨던 오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시며 다정히 말씀을 건네셨다. “먼 길에 점심 한 그릇 사 먹고, 몸 성히 잘 있다 오거라.”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손녀딸을 위한 응원이자 격려라 느껴졌다. 그 한 번의 회초리 사건은 훗날 집을 떠나 객지에서 살 때 언제나 마음속에 지침으로 따라다녔다.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는 대가족의 식솔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으셨으리라.

싸리꽃은 얼른 눈에 띌 만큼 화려하지 않다. 다른 나무들과 잘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는 싸리나무들처럼 자손들도 세상 속에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셨을까. 엄하기만 하시던 할아버지가 오늘따라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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