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학개론 / 김인선

 

평상은 나누는 걸 좋아하는 우리의 자리였다. 식구들을 불러 모아 저녁밥을 퍼주었고 이웃이 오면 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앉으면 앞산이 보였고 누우면 별들이 쏟아졌다. 아이들 따라 밤하늘의 반짝임을 헤아릴 땐 한없이 순수했고, 그 아이들이 남기고 간 재잘거림을 새길 땐 혼자서도 궁리가 많았다.

 

평상을 두고 우리의 벗이었다 말하는 것은 말의 낭비가 될 것이다. 길을 가다 평상을 만나면 앉고 싶어지고, 앉으면 쉼이 되었다. 평상이 아름다워서라기보다 인간의 높이가 본디 그러해서일 것이다. 평(平)과 상(床)에는 평등하게 둘러앉아 일상의 즐거움을 나누라는 순연한 몸짓이 있다. 양반의 정자는 평상에서 반상의 지위를 나누었으니, 본디의 품성을 지닌 평상이야말로 귀천존비를 구분하지 않았다 하겠다.

길 가는 누구나 한번쯤 쉬었다 가라고 오늘도 납작 엎드려 평등보다 낮게 저를 눕힌 자리. 나는 평상이 좋다.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이 평범함이야말로 세대를 이어주는 구심점이라 할 것이다. 비가 오면 처마 밑으로, 햇살을 피할 땐 나무 그늘로, 이리 저리 옮겨 다녀도 한 집안에서 오래도록 추억을 나누었다. 스스로의 그늘일랑 일체 지니지 않은 채 낮에는 햇살을, 저녁에는 바람을 앉혔다. 평상은 낮고도 넓다. 그래서 온통 자연이다.

오늘은 평상에 앉아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은 날. 젊은 날엔 기둥이었다가 어느 결에 조용히 물러앉은 가장 낮은 어른. 평상보다 낮은 자리에서 가족을 길러내고 평상보다 삭은 다리로 저만치 앞서가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생 몫의 평상이었다.

 

아버지 무릎 근처

내 무릎 한 쪽이 삐걱거리던 날, 아버지는 네 개의 무릎을 가진 평상 위로 풀썩, 주저앉으셨다. 짠하고 습한 늦여름 더위가 함께 쓰러지는 듯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쳤을 평상보다 못한 다리가 허허롭게 비척거렸다. 제발, 너도 무릎이 아프냐고 물어오지 않기만을 나는 빌었다.

 

세상의 낮은 곳들이 아버지 다리쉼이 된 이후로 예고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식구들 몰래 경운기를 몬다거나, 그 경운기가 길을 이탈하여 아버지를 꼬꾸라뜨리거나, 그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아들이 받아 안거나…. 그것이 한 순간에 일어났는지, 연속된 동작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울 때 공중부양이 일어난다는 것이었고, 더러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한다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고요한 모습으로, 아니 좀 더 공허한 눈동자로 평상에 앉으셨다. 무채색 하늘을 담은 눈동자는 새털 같은 무게마저 버린 눈치다. 저 삭은 다리 속엔 격렬한 바람이 살을 에듯 지나간다지. 통풍에 신음하면서도 자식에게 불편함을 전가하지 않으려 애꿎은 무릎만 주무르셨다. 자식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제 내리사랑을 챙겼고, 아버지 또한 그런 자식을 탓하지 않으셨다. 제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원망이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다. 시집가는 딸의 뒤에서 눈물을 지우던 모습과, 손수 매운탕을 끓여주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남았을 뿐이다.

한때 새벽 논두렁을 걸으며 쌀이 자라는 소릴 지게에 담아오던 아버지 다리로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거렸다. 이제 이 구역에서 팔딱거리며 뛰놀 수 있는 유일한 다리는 저 뿐이란 듯 무례하고 잔망스런 발놀림이다. 일어서거나 주저앉을 때 조금 순조롭게 버틸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한 무릎으로는 저 푸른 것을 이길 수 없다. 아버지 무릎에 싱싱한 풀물을 입히고 싶다는 겨우 그런 것이나 소원할 때, 평상은 가만히 제 몸을 비틀었다. 저도 이제 늙었다는 것인지, 뼈마디 어디쯤에서 끙, 소리를 내었다.

 

밤도와 사랑하던 자리

마당 한가운데에 모깃불을 피우는 것으로 여름 저녁이 시작되었다. 저녁상을 차릴 무렵이면 아버지는 건초더미를 마련하여 불을 피우셨다. 덜 말린 쑥이나 논두렁을 달리던 풀들이 성마른 연기가 되어 굼실굼실 피어오르면 여름 한낮 들풀 냄새가 밤하늘을 타고 올랐다.

 

맵고도 따스한 연기였다. 초저녁 별들은 어둠 속에 작전처럼 숨어 지내다 이내 저녁이 달큼하게 기울어가면 예사로이 꽝꽝 터져 나왔다. 집 주위로는 산허리를 감고 도는 다랑논이 펼쳐지고, 그 논들이 동무되어 바다 쪽으로 달려가는 골목 끝집. 그때 평상은 세상을 다 가진 방이었다. 검은 산은 손에 잡힐 듯했고, 바다는 저만치서 낮게 흘렀다. 어둠 저편에서 여우 울음소리 들려오는 밤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귀신이야기가 출몰하였다.

평상에서 들어야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다. 감나무 아래 뒷간이 있어, 어쩌다 감이라도 펑 떨어지면 귀신이라도 나타났을까봐 비명을 질러댔다. 왜 무서운 이야기는 무서울수록 즐거운지. 드디어 어둠에 모깃불이 허물어져 내리면 우리는 졸음 쏟아지는 하품을 물고 방으로 들었다. 평상에서 방으로 갈 때마다 신발은 잘도 도망갔고, 귀신이 가져갔다고 누군가 더럭 놀리면 엄마야, 비명을 지르면서도 좀체 떠날 줄 몰랐다.

맨 처음 거실과 소파란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 생경스럽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것은 시골에서 무시로 들어오던 평상이란 단어와 너무도 이질적인 품위를 지녀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화려한 부잣집의 소파를 보면서 먼먼 서울이라는 곳에선 저렇게들 사나 보다. 저 푹신한 소파에는 이렇게 허름한 농부는 앉을 수 없겠지. 아무도 그렇다고 하진 않았지만, 세상 이치를 빨리 알아버린 아이처럼 마음이 울울했다.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밤 연속극에서 본 화려한 거실이 허술한 내 상상 속으로 찾아들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정물이 아니길 은근히 빌었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밤사이 이슬이 평상 위로 촉촉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무의 체온으로 잠이 든 평상은 헛된 꿈은 꾸어본 적 없다는 듯 인상이 말갰다. 간밤에 함부로 지은 부잣집을 치우듯 힘껏 걸레질을 했다. 쇠죽솥에 삶은 콩깍지를 까먹을 땐 행복하다 해놓고, 돌아누워 소파가 있는 집을 꾸었던 내 상상도 덩달아 치워지길 빌었던 것처럼.

귀신이야기를 함께 듣던 음산한 감나무도, 콩깍지 씌었던 추억도 오래 전에 떠났지만 평상은 지금도 고향 하늘 아래 늙수그레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벗이 많은 듯 가만히 누워 쿨룩거리는 음성들 흉내를 내고 있다. 그건 아마도 저도 이제 늙었으니 다리를 고쳐 달라는 신호겠지.

오늘은 평상에 앉아 가족을 불러보고 싶은 날. 친정집 벗어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돌아보는 자리엔 언제나 가족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꽃냄새를 맡는 듯 엎드린 평상이 있다. 어린 시절에서 불리어 온 듯 그 모습 그대로 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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