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 김보애

 

 

꿈을 꾸었다. 푸른 바다로 캠핑을 갔다. 바닷가 예쁜 팬션에서 나는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무척 많았던 것 같은데 우리 아이들과 강아지 돌프만이 기억이 난다. 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굽고 상을 차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곧 화산이 폭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TV를 켰더니 그래픽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시퍼런 바다 밑에 붉은 마그마가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곧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얼른 그 집에서 빠져나와야지 싶어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그런데도 나는 가방이며 옷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찌개 냄비까지 챙겨 넣고 있었다. 우리는 급히 바깥으로 뛰어나와 차를 탔다.

곧 다가올 어마어마한 사건 앞에 잔인하게도 어촌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넋이 빠져 마구 차를 달리는데 세상에!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비키라고 클랙슨을 아무리 울려도 아이들은 막무가내 천진하게 웃으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그 아이들에게 비켜야 한다고, 빨리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외쳤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놀고 있기만 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저녁 노을빛으로 붉게 퍼져 나가고 트렁크 가득 짐을 실은 나는 불안한 모습으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오기나미 나오코(荻上直子)감독은 ‘슬로우 라이프 (Slow Life)를 하나의 모티프로 영화를 만든다. 2007년 개봉된 〈카모메식당(かもめ·食堂)〉이라는 영화는 갈매기들이 조용히 날고 있는 핀란드 헬싱키의 바닷가를 무대로 전개된다.

주인공 사치에는 이곳에서 작은 일식집 ‘카모메식당’을 경영한다. 오랫동안 병든 부모님을 돌보느라 지쳐 있던 중년 여인 마사코는 TV에서 행복한 핀란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여행을 왔다가 잃어버린 자신의 짐을 기다리며 우연히 이 식당을 찾게 된다. 주인공 사치에와 또 다른 여자들, 우락부락한 외모 콤플렉스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미도리와 남편에게 버림받은 핀란드 여인, 그리고 자신의 생을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한 마사코, 쓸쓸한 이들 네 여인의 이야기는 ‘카모메식당’을 위로와 행복으로 채워나간다.

드디어 항공사에서 마사코의 짐을 찾았다는 연락이 온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으로 연 마사코의 트렁크 속에는 짐은 온데간데없고 햇빛색깔의 노란 버섯만 가득 차 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어느새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오기나미 나오코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안경(めがね)〉 역시 ‘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에 지친 어느 여류 작가 타에코가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 바닷가 어느 마을 작은 팬션으로 찾아온다. 주위는 오로지 광활하고 푸른 바다뿐,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뭘 하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팬션의 주인은 ‘타소가레’(사색)라고 말한다. 그저 광활한 바다 앞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가만히 사색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 좋은 주인은 왠지 그녀의 짐을 전혀 소중히 하지 않는다. 다른 쉴 곳을 찾아나선 그녀, 그러나 다시 별수없이 다시 되돌아오는 뜨거운 시골길에서 그녀의 무거운 트렁크는 말 그대로 짐이 된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색가 사쿠라씨의 자전거는 2인용, 그녀의 트렁크를 실을 자리는 없다. 자신이냐, 짐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는 결국 짐을 포기한다. 어린아이 키만큼 높이 자란 시골의 거친 풀들 사이로 그녀는 사쿠라 씨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길거리에 던져진 채 점점 멀어져 가는 자신의 짐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비로소 사색의 시간은 시작된 것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아파트 평수를 줄여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올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많은 짐들을 버렸다.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욕심이라 인정하며 버렸다. 혼자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막막한 두려움과 쓸쓸함으로 1년여 가까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참 덜어내고 덜어내도 여전히 많은 것이 짐이다. 물건에 대한 것, 관계에 대한 것, 때로는 의로운 것이라 생각했던 도의도 무모함의 소치였으며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나는 어쩌면 내 마음의 열두 칸 방방에 온갖 짐을 다 넣어놓고 그것이 짐인 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어느 할머니는 고생을 하며 일으킨 회사를 하루아침에 다 팔아, 수도원과 사회복지센터에 기부를 하고, 자신은 작은 시골집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다.

어느 날,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이 평생 아끼던 소중한 카메라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다 버리고 빈손으로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졌다고 하셨다. 종교인으로서 반듯하게 잘 사시면서도, 죽을 목숨인데 짐이 너무 많다며 생활비조차 아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는 마리아 할머니를 보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삶이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시퍼런 바다 밑의 붉은 마그마를 보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하나하나 재워 담던 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본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끌려가는 삶인지, 주체적으로 끌어가는 삶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생각해야 한다. 푸른 바다와 붉은 마그마의 꿈은 평화와 대립하는 불안의 모퉁이에서 서성대는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이나 〈안경〉은 삶에 지친 현대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그처럼 내가 이런 영화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내 안에 삶의 불안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잘 살아야겠다고 용을 쓰는 나의 모습이 거울처럼 명확하게 보인다. 잠시 짐을 놓고 쉬어가 보자. 그 아우성 속에서도 천진하게 축구를 하며 놀던 아이들을 생각해보자. 천사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 그 아이들에게 걱정이나 근심이 있던가. 나의 두려움과 걱정은 내 마음의 무거운 짐에서 시작되는 것,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되는 계사년 아침을 맞자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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