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전화기 / 손진숙

 

묵언 수행 중이다. 경쾌한 소리를 낸 적이 언제던가.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거린다. 유선전화기의 용도가 왜 이렇게 쓸모없이 전락해 버렸을까.

결혼 전, 시골집에서 지낼 때였다. 동네에서 전화가 있는 집은 이장 집과 제일 큰 기와집뿐이었다. 전화를 꼭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대문을 두 개나 지나고도 섬돌이 높은 부잣집보다 파란 함석대문이 열린 사이로 마루가 훤히 보이는 이장 집으로 가기가 수월했다.

“전화 좀 하려고요.”

어렵게 입을 떼면 싫은 내색 않고 전화기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몸체가 검은 전화기였다. 교환원을 통해 통화 신청이 가능한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동안 떨림과 설렘이 일었다.

신혼 단칸 셋방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외부와 교류가 뜸해진 나는 별 불편을 못 느꼈지만 남편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직장에서 비상 연락망이 필요했다. 이듬해 이층 전세로 이사를 간 어느 날 남편이 전화를 설치했다. 전화 설치비의 출처를 알고 서운한 한편 화도 났다.

내가 결혼할 때 받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손가락에 끼기에는 거추장스러워 거의 빼놓고 지냈다. 그 반지를 나 몰래 들고나가 팔아서 전화기를 개설했던 것이다. 반지 임자의 허락도 없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끼지도 않는 반지를 두어 뭐하냐고 오히려 반박했다. 술 마시거나 노름하여 잃어버리지 않아서 양반 축에 든다고 할까? 반지에 그다지 애착을 가지지 않은 편이라 더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설사 불평을 쏟은들 무슨 소용이랴. 이미 인연이 다해 당장 필요한 전화기로 변신한 터수에.

새 식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게 도리이고 순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고락을 함께한 지 어언 35년. 그동안 생활에 전화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모른다. 이사 갈 때 모든 짐을 싸서 이삿짐 차에 싣고 맨 나중 벽에 꽂힌 전화선을 뽑았고, 새 집에 가서는 맨 먼저 전화선을 콘센트에 연결했다.

전화벨은 울려야 제맛이다. 친정어머니 살아계실 때가 우리 집 전화기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매일 아침 “최 서방 출근했나?”로 시작되는 어머니 음성. 전화선을 타고 고향집 흙냄새가 묻어오고, 대숲의 서걱거림이 밀려왔다. 부엌 앞 컹컹 짖어대는 개소리도 들려오고, 빨랫줄에서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도 실려 왔다. 도시의 혼탁한 공기에 찌든 막내딸을 위하여 아침마다 청정한 시골 향취를 배달했는지도 모르리라.

어머니 이 세상과 작별한 날. 큰올케가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그 전날 어머니 홀로 거처하는 집에 들렀을 때,

“이상하다. 숙이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전화 한번 해 봐라.”

“저도 번호 못 외우는데요.”

그렇게 어머니는 내 전화번호를 잊은 채 먼 길 떠나셨다. 이후로 우리 집 전화벨이 울리는 횟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와 때를 맞추어 휴대전화 이용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수족처럼 다루는 시대가 되었다. 요즈음에는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스마트폰 유튜브를 감상하다가 잠이 든다. 가족 수대로 모바일이 있으니 유선전화는 무용지물에 가깝다. 아주 가끔 유선전화벨이 울리는 경우는 잘못 걸려온 전화이거나 여론조사가 아니면 광고전화이기 십상이다. 유용하고 실속 있는 전화가 집전화기로 오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얼마 전, 보이스피싱 전화가 온 뒤였다. 이참에 유선전화를 해지해버리면 어떨지 남편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비록 지금은 쓰임새가 없더라도 다시 가입하기는 어려우니 그냥 두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유명무실해진 전화기를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뒷방이나 구석으로 밀려나지 않고 여전히 눈에 잘 띄는 텔레비전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용 빈도가 희박하더라도 화려했던 시대의 체통은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거실장 위에 놓인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본다. 묵언 수행에서 화들짝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인가. 웅- 뿜어내는 음音이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물소리 같기도 하다. 유선 전화기 속에는 소중한 인연의 향기가 잠자듯이 고여 흐르고 있다.

 

<계간수필 202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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