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 진료비 / 장석창

 

 

퇴근길 아파트 승강기 앞이었다. 이 시간이 되면 항상 피곤이 몰려온다. 승강기 앞에서는 칠십 대 노부인과 사십 대 남성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모자지간 같았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나라 의사들…, 진료비를 좀 올려주긴 해야겠어.”

“왜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글쎄, 오늘 안과에 갔는데 백내장이니 무조건 수술하라고 하네. 심하지도 않다면서. 하긴 의사가 그러는 것도 이해되긴 해. 진료비가 워낙 싸니 건수라도 늘려야지 않겠어?”

“진료비가 1달러인 나라는 우리 나라뿐이에요. 동남아에 가도 그 돈으로는 어림없어요.”

박리다매(薄利多賣)라. 씁쓸했다. 흔히 신성한 의료 행위라고 하지 않던가. 일반인들에게는 의료 행위가 값싼 상거래의 하나쯤으로 인식되어 있다니. 그들이 의사를 욕하는 것인지, 동정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얼마 전에 아내의 이종사촌 언니네 식구를 만난 일이 떠오른다. 그녀는 35년 전 자녀들을 위해 미국 이민을 떠났다. 췌장암으로 남편을 여읜 후, 노후를 모국에서 보내기로 하고 역이민을 택했다.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딸이 한국에 온 것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마취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재미교포이다. 의료계 종사자들이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대화는 미국의 의료 상황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나이가 들어 살 곳이 못 돼요.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병원에 갈 일이 많은데 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나는 교포 1세라서 미국에 그리 애착도 없고요.”

“미국의 의료비가 비싸다는 건 알고 있는데, 대체 어느 정도입니까?”

“남편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비가 200만 달러 나왔어요. 사위가 의사여서 꽤 괜찮은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보험회사에서 반만 부담하고 본인 부담금이 100만 달러나 나오지 뭐예요? 그래서 아예 파산신고 해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지요.”

“200만 달러요? 그럼 20억이 넘는단 이야기예요?”

“그에 비하면 한국은 얼마나 좋아요. 어제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30분간 물리치료를 해주고 1,500원 받더군요. 미국이라면 몇 백 달러가 나왔을 텐데….”

그리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딸이 대화에 동참했다.

“미국에서는 과잉 진료를 할 수가 없어요. 보험회사에서 매의 눈으로 감시를 하거든요. 남편이 그러는데 소송이 워낙 많아서 서류를 작성하는 시간이 실제 진료 시간보다 길다더군요.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을 때도 설명해준 내용마다 환자의 자필 서명을 일일이 받아둔대요.”

최고의 자본주의 사회라는 미국의 의료 현실이다. 이쯤 되면 미국에서 개인 파산의 60%는 병원비 지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거짓은 아닌 것 같다. 보험 체계가 영리 추구의 사보험이다 보니 의료의 상품화는 필연적일 것이다. 의료비가 비싸고 소송이 많으니 의사는 환자의 상태 파악과 관계 구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마련이다. 환자는 의사 만나는 문턱이 높고, 의사는 많은 환자를 보지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의사는 자기 환자의 진료에 매진하게 되고, 환자는 의사를 믿고 따르는 것 같다.

 

'1달러 진료비'의 잔향이 귓가에 맴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1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의점에서 라면 한 봉지를 사면 거스름돈을 약간 돌려주겠지. 조금 보태면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마실 수도 있겠다. 물론 환자의 본인 부담금은 의사 수입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값싼 진료비 때문인지 일부 환자들은 의료 쇼핑을 한다. 방금 옆에 있는 병원에 다녀왔는데, 그 의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러 왔다는 환자도 심심치 않게 본다. 여러 의사의 의견을 다양하게 들어보는 것이 환자의 권리이긴 하다. 하지만 의사인 나로서는 이런 환자를 대할 때면 다른 의사와 비교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뭐라고 조언해도 믿지 않으리라는 선입견에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그들이 진료비를 내면서, 호텔 방을 나서며 침대 위에 올려놓는 1달러 지폐쯤으로는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의사와 환자 간의 라뽀(Rappo) 형성은 치료의 구심점이다. 일전에 모 대학병원의 후배 비뇨의학과 교수를 찾아갔었다. 내 전공 분야의 진료를 다른 의사에게 받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늘 시간에 쫓기는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직속 선배인 나를 대할 때도 그러한데, 일반 환자들에게야 오죽하겠는가. 나는 상황을 알기에 질문을 삼갔다. 담당의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며 영상 사진과 검사 결과지를 한 움큼 들고 나를 찾는 환자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씁쓰름했다. 가벼운 백내장이라면서도 수술을 권하는 의사, 걱정 어린 환자의 질문을 퉁명스럽게 끊어버리는 의사…. 이런 의사를 만나면 환자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진정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믿음을 주는 의사이리라. 이 의사와 함께라면 병에서 치유되리라는 믿음, 마음의 평온을 찾으리라는 믿음,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믿음…. 어린 시절부터 이 직업을 동경했다. 단지 돈과 명예를 좇은 것은 아니지 싶다. 직업인으로서의 생계수단이 아픈 이에게 도움을 준다는 점이 좋았다. 의사로서 첫걸음을 내디딜 때가 생각난다. 나를 찾은 이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 능력이 안 되면 실력 있는 의사를 소개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짐을 느낀다. 불신의 악순환 때문일까. 생계형 의사로 살아온 지 이십여 년, 순수했던 청년 의사는 오간 데 없고, 세속에 찌든 손으로 메스를 드는 위선적인 중년 의사가 여기 있다.

 

1달러 진료비.

‘의술은 인술인가, 상술인가’라는 해묵은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니까.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의사와 환자의 신뢰감은 몇 달러나 될까?

<한국산문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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