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失鄕民 / 류영택

 

암실에 들어선 기분이다.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좀처럼 기억을 끄집어 낼 수가 없다. 그저 멍할 뿐이다.

까만 필름에 한 방울의 현상액을 떨어뜨린다. 희미했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흑과 백이 또렷이 나타난다. 하지만 구분이 가지 않는다. 지난 날 검게 서 있던 석류나무가 하얀 머리를 부풀리고 서 있다.

이젠 인화 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붉은 호박등불 아래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친 석류나무가 검게 모습을 드러낸다. 굵은 밑동과 위로 뻗은 가지와 울창한 잎사귀들, 그리고 속내를 알 수없는 석류열매가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용마루의 망새가 자취를 감추던 날 내 과거도 함께 사라졌다. 주렁주렁 유년의 기억을 머금고 있던 삽짝 앞에 서 있던 석류나무도 장독대 옆에 서 있던 감나무도 사라졌다. 가끔 고향 집 텅 빈 마당에 서성일 때마다 나는 인화지에 사진을 현상하듯 톡 하고 기억을 떠올리는 한 방울의 약을 복용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라는 약이다. 뺨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을 혀로 핥으면 눈앞을 가렸던 기억 저편의 흐릿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실체를 만질 수 없는 기억은 허상일 뿐 결코 현실이 아니다.

나는 그 기억을 상기시킬 매개체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일이 어디 나 혼자의 만의 일이겠는가. 고향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마음의 고향, 훈훈했던 동심을 잃어버릴까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마음만 먹으면 훌쩍 갔다 선걸음에 휑하니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이 있어 마음의 고향마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텅 빈 마당에 서 있는 나는 망향의 동산에 서서 두고 온 북녘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마음과 다름없다.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 언젠가는 그 그리움의 약으로도 재생시킬 수 없는 유년의 편린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크게 동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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