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여우와 하현달/ 김애자

 

 

닭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이 환하여 머리맡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네 시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을 시간인데도 사물의 윤곽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날짜를 꼽아 보니 동짓달 스무이틀이다. ‘아, 하현달이 떴구나.’ 반가움에 일어나 쌍바라지로 된 여닫이창을 활짝 열자 고요히 머물러 있던 달빛과 찬바람이 일시에 밀려든다. 얼른 뒤로 물러나 달빛과 바람을 공손히 모셔들인다. 만월이 아닌 그믐을 향해 야위어 가는 달이라서, 아니 한밤에 뜨는 달이라서, 괴로움에 잠들지 못했거나 새벽에 깨어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달이라서, 그렇게 공손히 모셔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다.

닭 우는 소리가 그치자 사위는 다시 고요하다. 달빛 아래서 실루엣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며 동쪽 울을 끼고 굽이쳐 돌아나간 여울이며, 여울을 따라 이어진 전답이며, 그 사이로 조붓하게 뻗어나간 농로와 마른 잡목들의 구도가 정갈하다.

TV채널도 잡히지 않는 오지로 들어온 후 남편과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내년 봄 화단에 심을 파초의 구근을 얻어다 땅에 묻고, 강아지에게 새집을 마련해 주고 벌채하는 곳에서 통나무도 한 트럭 사들였다.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사들이고 먹을 것을 비축하면서, 잎을 떨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의 그 역현상을 보고는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작은 기쁨을 누렸다. 세상을 쉽게 사는 이치가 생활을 간소하게 줄이고 생각을 단순하게 가지는 데 있음을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런 것들은 사소한 듯싶지만 실은 새로운 삶에 이정표를 세우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청주에 갔었다. 우연히 찻집에서 S시인을 만나 차를 마시면서 문학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요즈음 인터넷으로 들어오는 작품들은 묘사가 쉽고 감각적이라며 문학의 본질과 형태가 바뀌고 있어 기성작가들도 이런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으면 마치 못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모하다 죽은 나르키소스처럼 혼자 쓰고 혼자 읽다가 사멸하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또 문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21세기의 생명공학의 발전은 사람의 수명을 150살 이상으로 연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암은 물론 모든 질병은 의약품이 해결해 주고,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로봇이 명령만 내리면 제가 알아서 집안 일을 척척 해주는 기차게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부디 섭생을 잘하라는 덕담으로 대화를 마무리짓고 헤어졌다.

그 날 시인이 살고 있는 도시의 하늘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잿빛이었다. 나는 자동차들이 광기처럼 쏟아내는 라이트와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어둠을 살라먹고, 물질의 성채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도시를 뒤로 떠나왔다. 떠나오면서 내내 보이지 않는 입자로 부유하는 오애(汚埃) 속에서 아마도 시인은 오늘밤에도 신화가 아닌 실존의 나르키소스가 되지 않으려고 사이버 공간에서 젊은 작가들과 새로운 접속을 시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군불을 지폈다. 정말 산골로 들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봐란듯 장작개비를 아궁이에 가득 집어넣었다. 불꽃이 너울너울 고래 깊숙이 들어가자 굴뚝에선 푸른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질화로에 잉걸불을 담아다 놓고, 달구어진 아랫목에 엎드려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를 읽었다. 가끔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 귀를 모으면서.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와선, 산 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마른 시래기만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땅바닥을 뒷발로 탁탁 치다가” 돌아갔을 여우가 혹여 문밖에 와 있지 않을까 싶어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 귀를 곧추세우곤 하였다. 정말 여우가 내려왔으면 좋겠다. 마른 북어라도 한 꾸러미 내주어 어린 새끼들이 허기를 면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여우는 내려오지 않는다. 산간에 전깃불이 들어온 후 여우는 광휘로운 문명의 빛을 피하여 더 깊은 산 속으로 몸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우가 사라진 산촌은 마치 전설을 잃어버린 달과 같다. 달 속의 계수나무를 찍어다가 대궐 같은 집이 아닌, 초가삼간을 지어 어버이를 모시고 천년만년 살고싶어 하던 효자의 갸륵한 소망이 인간의 도리를 일깨우던 노래가 마치 인정머리 없는 세상을 뒷발로 툭툭 치다가 힘없이 산으로 돌아간 여우처럼 그렇게 우리 곁에서 쓸쓸하게 사라져버린 탓이다.

문명의 빛으로 동물들과의 교류가 끊어진 단절감 때문에 나는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달의 표면에 특급호텔을 지을 것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 아니 수용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을 거부한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달나라 호텔에서 잠을 자고 우주공간에 나가 무중력상태에서 유영을 즐기고, 우주열차를 타고 지구 전체를 하루만에 돌고 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첨단과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첨단과학이 주는 호화스러움을 쫓아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돈벌이에 미친 듯 기를 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주할 것을 우려해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 그 자체가 경쟁이다. 경쟁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면 달나라에 있는 초특급 호텔도, 하루 만에 지구를 돌고 올 수 있는 우주열차도 그림의 떡이다. 똘방지고 돈 많은 사람들만이 로봇을 부리고 우주여행을 즐기고 노화되는 세포와 장기를 교체해가며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집안에서 학교수업도 직장의 업무도 컴퓨터 화면으로 해결하는 그런 세상이 되면 어떻게 노동의 가치를 알 것이며, 파초의 구근에서 새순이 움트는 경이로움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인간적인 아픔이나 기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여명의 직전, 정갈한 구도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하현달을 보며 가만히 입 속으로 뇌어본다. 흙과 농부, 닭 우는소리, 장작더미와 저녁연기, 빨랫줄과 바지랑대, 이런 조화로움의 전체성이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도 여전히 지켜지기를 희원(希願)하며 여닫이창을 닫는다.

 

(2000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