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를 쥔 아이 / 남정인

 

 

 

초여름의 무논이 은회색 실크 자락처럼 반짝였다. 너울거리는 빛을 헤치고 논두렁을 따라 노인과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네댓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는 할아버지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다시피 걸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어느 집으로 갈 것인지 궁금했는데 할아버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곧장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철 지난 검은 모자와 땅에 닿을 듯한 낡은 두루마기에 볼이 움푹 팬 할아버지는 더없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앞섰다. 우물가에 있던 엄마는 할아버지와 아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다가서며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이 애가 내 딸이 연애질해서 낳은 놈이요.”

“애비 놈은 군대에 가버리고 우리 딸년은 행방불명이요. 할멈은 죽고….”

“이 집 형편을 알고 왔소. 호적에 올리고 잘 키우시오.”

할아버지는 화난 것처럼 말했다. 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조차도 짓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 관심사는 그 아이였다. 아이는 검은 학생복을 입고 있었다. 단추의 금색 도금이 다 벗겨진 채로 낡을 대로 낡은 옷소매를 몇 번이나 걷어 올렸는데 바지는 윗옷과 어울리지 않게 작았다. 얻어 입었다는 것은 어린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볕에 그을리고 튼 볼에 흐른 눈물 자국과 검정 고무신 속에 딱지가 앉은 까만 발이 애처로웠다. 아이는 손톱에 까만 때가 낀 통통한 손으로 제 주먹 반만큼이나 되는 우렁이를 꼭 쥐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우렁이 뚜껑을 꾹꾹 눌러 물을 짜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나는 그 아이에게 까닭 없이 호감이 갔다.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렁이 어디서 잡았냐?”

“….”

“한번 줘볼래?”

아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내주었다. 감히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어떤 결정에도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아이 눈에 고인 눈물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얼른 우렁이를 도로 아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더 바싹 다가앉았다. 그러면 어른들 말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엄마의 대화 내용은 그대로 들렸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떼놓고 가고 싶어 했다.

“저놈이 순합니다. 아픈 데도 없고….”

“아니요.”

엄마는 단호하지는 않았어도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날 엄마가 한 말의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손도 잡지 않은 채 돌아섰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일어나 할아버지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이가 좀처럼 할아버지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신작로를 건널 때까지도 아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울 법도 한데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논둑길에 접어들자 할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나는 대문간에 서서 그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가 번들거리는 무논을 지나 냇둑에 걸려 있을 때 그들은 하나의 점이 되었다.

그날 엄마는 무표정이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지워야 했다. 오빠는 물론이고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마와의 약속이었다. ‘형편을 다 알고 왔다.’는 할아버지 말처럼 오빠의 건강은 누가 생각해도 위태로웠다. 큰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오빠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한테 머리를 맞았을 때 소뇌를 다친 것 같다는 짐작만 했다. 오빠가 거동하지 못하게 되자 엄마는 오빠에 대한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의 큰 눈은 얼굴을 다 차지할 것처럼 컸고 몸은 점점 말라갔다.

그즈음 집안에서는 외아들인 오빠가 대를 잇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막내인 나한테 묻곤 했다. 엄마 배에서 나올 때 문 닫고 나왔는지 열고 나왔는지를. 그러면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닫고 나왔어요.”

문이라는 것은 닫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 지론이었던가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엄마의 가임 기간까지 무수히 들었던 질문이었고 대답이었다.

우연히 한의원을 하는 배 씨라는 분을 만났고 오빠는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그렇게 엄마의 한과 자존심을 세워주기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 그동안 엄마는 밤이 돼도 불을 켜지 않은 날이 많았다. 어둠 속에서 내쉬는 한숨 소리에 우리 세 딸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나는 모성애가 위기를 맞으면 지극히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해진다는 느낌을 엄마한테서 받곤 했다. 십 년이면 무엇인들 변하지 않을까. 엄마는 그 아이가 잊힌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날카롭고 어두웠던 엄마의 표정은 오빠가 자기 몫을 해내면서 밝아졌고 늙어가면서 오히려 아름다웠다. 어느 날 엄마는 내 아이가 실내화 주머니를 휘두르면서 학교 가는 모습을 보더니 문득 회상하듯 말했다. 엄마가 2년 정도 냇둑 너머 학교에 근무했을 때 얘기였다. 삼 학년 담임을 했을 때, 숙제 검사를 하는데 빈 공책을 수줍게 내밀고 ‘연필이 없어서 못으로 썼어요.’라던 남자아이가 있었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못으로 쓴 자국이 보였다는 얘기를 스치듯 말했다. 할아버지와 둘만 사는 아이였다면서. 나는 직감했다. 그 애가 우렁이를 쥐고 있던 아이라는 것을.

엄마가 그 학교에 근무했을 때, 아버지 모르게 엄마의 심부름으로 우태 아저씨가 쌀을 지게에 지고 냇둑을 넘어갔다. 우리 집은 냇둑 너머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단지 그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가 그 아이 집에 갔을 거라는 나의 유추가 틀리지 않는다면, 엄마는 그 아이를 보듬지 못했던 미안함을 대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에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한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난 지금도 기억한다. 아이가 쥐고 있던 우렁이와 얼룩진 눈물 자국이 내 마음에도 번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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