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테이크아웃 / 고경서(경숙)

 

 

 

코로나 감염으로 여행길이 막히고, 사회 활동이 줄어들면서 숫제 집안에 갇혀 산다. 적극적인 사고와 언어가 첨예하게 곤두서면서 동력을 잃은 일상이 답답하고 무기력하다.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도 늘어나 대인관계도 경계심을 내보일 때가 많다. 그 파장이 지속될수록 칩거하는 공간이 유배지 같다. 현관문은 마스크처럼 굳게 닫혀 있다.

어둠의 미립자가 분열해 바이러스처럼 증식하는지 어젯밤보다 더 깜깜하다. 공기조차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런 날은 앨범 속 사진보다 명승지만 골라 담은 관광엽서를 본다. 전문가들이 가장 완벽한 피사체로 찍은 풍경은 정돈된 아름다움으로 축축한 기분을 밝게 해준다. 점차 숨구멍이 트인다.

전염병이 발병하기 이태 전에 동유럽으로 패키지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에서 사 온 엽서를 한자리에 쫙 펼쳐놓는다. 그런데 엇비슷한 자연환경과 건축물 탓인지 기억들이 겹치거나 겉돌아 선명하지 않고 어렴풋하다. 구경하는 재미와 호기심으로 탄성을 질렀던 그때의 감흥이 살아나질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감정은 애매한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흥미로운 반전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각 나라가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지만 7개국을 10일에 관광하는 것은 강행군일 수밖에 없다.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경로와 일정을 소화해야하는 부담감도 적지 않다. 배낭여행과 다르게 개개인의 행동에도 제약이 따른다. 어쩌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포장한 세상에 상처받고, 그 응어리를 풀려고 나선 길이라면 민낯과의 대면도 어색하다. 그곳이 평소에 꿈꾸던 지상낙원일지라도 멋진 경관을 감상하고, 삶을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동유럽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서인지 중세의 이미지답게 조형미가 빼어난 건축물들이 많다. 도시의 중심지엔 하늘로 치솟는 첨탑을 가진 성당이 있고, 시계탑이 내려다보는 광장은 북적이는 인파로 활력이 넘쳤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골목들도 고풍스럽다. 오스트리아의 성 슈테판 성당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마신 차고 부드러운 비엔나커피는 빈이 예술의 본 고장임을 인지시켰다. 또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이 보이는 카페에서 음미한 에스프레소의 깊고 풍부한 향은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한껏 부추겼다.

그러나 여행지의 색다른 멋과 맛에도 불구하고 뭔가 제대로 완상하지 못한 아쉬움을 끼고 다녔다. 부다페스트의 상징인 세체니 다리나 우아하고 섬세한 국회의사당은 일정표에 포함되었으나 원경으로 만났고, 예술가들의 생가나 박물관도 관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영롱하게 변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한 향연도 놓쳤다. 특히 크로아티아의 쟈그레브에선 시간에 쫓겨 가스등만 보았다. 매일 긴 막대기를 손에 든 점등인이 일일이 불을 밝히는 저녁은 너무 멀었다. 가이드의 동선대로 움직이다보니 외양만 보고, 숨겨진 속살과 조우하지 못했다. 곳곳의 다채롭고 풍부한 공간적 체험이 모자라 사색이나 철학적인 성찰을 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족감을 느끼기보다 아쉬움으로 허둥거리다 발길을 돌려야했던 숱한 말줄임표들. 안타깝게도 관광을 즐기고 온 게 아니라 마케팅에 참여하고 온 느낌이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테이크아웃이 새로운 외식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지 못하고,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생겨난 현상이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상대의 눈빛을 쳐다보며 수다를 떨던 그 익숙한 장소를 잃어버린 휴유증이 크다. 반면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음식점이나 카페를 집으로 옮겨오는 일이다. 이를테면 장소의 공유이다. 생각의 전환이 새로운 각도로 방향을 잡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유한한 일들이 무한한 영역으로 이동한 것이라고나 할까. 문득 패키지여행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테이크아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친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음식을 포장하는 상행위가 삶의 한 단면을 차지한 건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건 장소와 시간을 불문한다. 즉 얽매이지 않음이다. 상품을 팔고 산다는 것, 물건이나 여행이나 다를 바 없다. 패키지여행은 관광지를 상품으로 판매한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이니 실물은 대충 눈으로 훑고, 정작 심도 있게 음미하는 건 나중이다. 천천히 추억을 소환해 되씹는 일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마음에 쟁여두었던 패키지의 상품들, 말하자면 그건 테이크아웃된 이미지와 감정들이다. 관광지의 엽서를 펼쳐놓고, 미처 발산하지 못했던 감정의 편린들과 잔향들을 음미하다보면 여행의 색다름에 젖어든다.

자정이 넘었다. 어둠이 살아 움직인다. 인생이나 여행은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따라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단절의 시대에 바람처럼 휙휙 스쳤던 여행지의 감동이 마음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해 어떤 공감이나 울림은 적었지만 역병에 지친 심신을 다독이고 위로해주고도 남는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라고 말한 사람은 알랭 드 보통이다.

아드리아 해의 군청색 물빛처럼 굳게 닫힌 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우울한 마스크로 가렸던 이기심을 벗고, 나만의 자유의지로 여행가방을 챙기는 날들을 상상한다. 세상의 왁자한 소리가 어둠을 밀어낸다. 그 진동이 꿈결인 듯 들려온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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