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 송영호 

 

골목은 기대를 품게 한다좁을수록 더 그렇다시멘트 바닥에서 꺾인 햇살은 망설임 없이 벽을 타고 다락방의 자잘한 꽃무늬 커튼 틈새로 밖을 본다바람도 먼지도별빛에 달빛까지 마음 놓고 다녀가는 골목흔적이 탁한 유리창을 열어 햇살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골목은 고향 냄새가 난다진입금지 팻말이 없어도 자동차는 없다그래서 더 좋다드문드문 페인트가 벗겨진 철대문은 금방이라도 철그렁 소리를 낼 것만 같다.

문이 열리는 그때얼굴을 내민 주인공은 아주머니이기가 쉽다마침 지나던 초로의 신사와 마주치면 아주머니는 소리 없는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신사는 목례로 가던 길을 서두른다어쩌면 근래에 퇴직을 했으리라신사는 얼굴이 밝지 않다아주머니는 더 이상의 인사를 건네지 않으리라잠시 손가방을 뒤적뒤적꺼냄도 없이 신사가 지난 길을 나선다신사의 걸음도 빨라졌으리라.

좀 더 들어가면 창문 화분에 꽃이 빨갛다제라늄이다길쭉한 화분은 흙도 검다. 4월에 꽃을 피웠으니 제 몫이 어느새 한 달 보름이다꽃은 골목의 주인이다골목을 밝히는 보안등이다아니다더 밝다화분을 잘 가꾸는 이와 인연 맺으라는 친구 지침서가 있던가뚜껑 달아난 주전자로 물을 주는 손이 투박하다소매를 접은 팔을 따라 시선이 머문 얼굴은 인상이 좋은 아저씨이다그렇지늦가을까지 한결 같이 꽃을 피우는 화초를 아는 사람이면 거친 인상을 가질 일은 없다금방이라도 웃어줄 표정에 목례를 하고는 더 들어간다.

저택은 가난하다사방이 트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시장성도 투자성도 좋다하지만 속내는 빈곤하다가진 듯해도 가장 귀한 건 못 가졌다다정한 골목이 없다오순도순 마주 보는 정감을 누리지 못한다전지 잘 된 정원수는 말 수 적은 식구처럼 집을 치켜도 생동의 음률은 없다벽 안 쪽만의 퍼져나감도 들림도 없는 소리뿐일 게다마음의 빈곤이다.

숨결이라도 들릴 듯 골목을 함께 나누는 주택들은 공유체이다도배를 언제 했지가계부를 들춰야 한다그만큼 변함없는 곳이 읍 소재지 외곽의 골목이다오래된 골목의 남루함은 오히려 편안하다변할 일이 없으니 안심이다버리기는 아깝고 들여놓기는 뭣한 의자 하나 대문 앞에 두고 앉아 발톱을 깎아도 흉 안 되는 곳이 골목이다지나시던 할머니 허리를 펴기에도 좋다발톱아저씨는 채듯 의자에 보퉁이를 기대 두고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는다한쪽으로는 쓰윽 있지도 않은 먼지를 닦으면 손사래 치면서도 걸터앉으신다가지 두 셋양파 몇 알도 귀를 기울이는 골목바람이 들어와 눈물이 된 두 눈망울은 7~80년을 거스른 지 오래다아무 티가 없다과거와 현재미래까지도 순순하니 받아들인 여유가 가득하다체념이 아니다지혜다연륜이 가져다준 긍정의 슬기이다.

"아칙은 자셨능교? 아니오늘이 벌씨로 장날인교?"

손수건으로 눈꼬리 한 번 훔치는 게 안녕한 대답인데 연이은 안부가 골목을 데운다.

문득 피아노 소리가 낭랑하다어느 집이지? '엘리제를 위하여'베토벤이 친구와 지나던 걸음을 멈추게 한 피아노 연주곡. "누가 저리 아름다운 곡을?"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보낸 극찬도 골목이라서 가능했다그의 연인이 테레제든 오타의 엘레제든 관계없다감미로움이 할머니를 감싸 안고 발톱아저씨를 스치듯 껴안더니 골목 저 끝까지 내닫는다.

엘리제를 위한 선율대로라면 인생의 여행 끝에 얻는 것은 맑음과 고아와 지고뿐이리라갈등과 불만이 막아서도 건반은 그것들을 기억에서 지운다두통의 고민도 하찮음이 되고 마는 리듬의 힘골목의 기운이다미레미레미레 미시레도라. 레 음에는 이 붙었으니 마음 끄덕임도 반음이 높다이제 애창곡이 하나 늘었다.

베토벤이 귀를 기울이던 골목의 감동도 양팔 벌리면 서로 닿는 좁다람이었으리라좁다란 아늑함이여나는 행복하다.

꺾일 듯 휘어진 골목을 들어가고 들어가면 막다름과 맞닥뜨린다발길이 서운하지만 되짚어나가는 멋도 골목의 매력이다들어갈 때나 나올 때 똑같은 곳본래 되짚을 줄 알아야 그리움도 키가 큰다쫓기듯 앞으로만 달린 길은 그 거리만큼의 시간 흔적이 갈수록 짙다후회가 묻어남이다과속으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정면 주시의 이유가 뜻밖에 단순하다걸음이 멈춰진다기쁨의 이유가 너무나 싱겁다.

행복은 모든 이가 공유한 목표지만 도달은 개인의 측량마다 다르다행복은 싱겁거나 달콤 짭짤하거나 각자의 잣대에 달린 일이다.

지난가을바닥에 닿을 듯 주저리주저리 샛노란 단감이 차지하던 골목 풍경그때보다 살이 빠진 느낌이다비움이 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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