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의 문 / 성낙향

 

손이 비트는 방향으로 노상 순하게 돌아가던 문고리였다. 내 의지대로 열리고 닫히던 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문고리가 난데없이 저항했을 때, 마치 그것으로부터 격렬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의 완강한 저항, 나를 가로막는 단단한 저항이 손끝으로부터 온몸에 전해졌을 때, 내가 그동안 이 문을 장악하고 살았다 여겼던 게 실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문을 온전히 소유한 건 내가 아니라 열쇠였다.

일요일 오후, 여행 가방을 옆에 던져두고서 나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잠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다. 그는 외출 중이다. 집을 비우고 나간 그에게 수없이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이런 상황에 처한 데는 내 책임도 있다. 일정보다 일찍 서둘러 귀가한 책임, 현관문 열쇠를 챙겨 나오지 않았던 책임. 그러나 나의 분노는 편파적이다. 내 잘못보다는 전화를 받지 않는 그를 향해서만 일방적으로 끓어오른다. 가방 속의 책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쳐보지만 산란한 머릿속으로 활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내 시선은 자꾸 문으로 가 꽂힌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지루한 대치를 이어가야 할 저 문에게로.

일상이 어긋날 때면 종종 뜻하지 않은 것들이 삶 속으로 뛰어드는 법이다. 오늘 내 앞에 느닷없이 버티고 선 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저 문을 이처럼 오래 응시한 적이 있었던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던 문이었으나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문은 낯설다. 늘상 문 뒤의 세상에 뛰어들기 급급하여 한 번이라도 제대로 문을 바라보지 못한 때문이다.

치통을 느낄 때 비로소 이빨을 환기하게 되는 것처럼, 제 등 뒤의 안락의자와 물 한잔을 향한 내 욕망을 저지당하는 이 불편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저 문, 문이란 존재를 직시하게 된다. 그래, 지금 이 시간만큼은 문 하나가 내 세계의 전부다.

저 문은 내가 만난 몇 번째 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문을 만났다. 각양각색의 문들, 내 인생은 어쩌면 그것들을 하나씩 열고 닫으며 지나오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자주 놀던 작은 교회당의 낡은 대문. 늦은 밤 지물포의 문에 끼워지던 페인트로 굵게 숫자가 쓰인 양철 덧문들. 혼자 힘으로 열기 버겁던 외가의 육중한 나무 대문. 안채의 세 살문들. 겨울이면 부옇게 김이 서리던 뙤창이 달린 철물점 가게 방문. 지각한 날 간발의 차이로 닫히고 만 학교 정문. 저마다 하나의 세상을 숨기고 있던 문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문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않았던 문도 많았다. 오늘처럼 나를 막아선 문들도 있었다. 수술실 문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시리다. 머리에 비닐 캡을 쓴 남편, 캡 때문인지 이상하게 낯선 얼굴의 그가 침상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어느 때보다 함께이고 싶은 시간에 서로를 떼어놓고 마는 썬팅 된 문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긴 남편만큼이나 나도 외로웠다. 그리고 공황의 출국장 문도 그랬다. 먼 이국으로 떠나는 아들 녀석이 출국장으로 들어가 그 아이 등 뒤에서 문이 닫혔을 때,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나는 또 다른 여행객에 의해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빌리섹의 말을 떠올렸다.

“문이란 칼과 같죠. 세계를 두 개로 자르니까요”

문은 벽의 연장이다. 이동식 벽이다. 그러니 문의 속성은 개방보다는 폐쇄에 있다. 닫혀있을 때 견고하게 저항하는 문이 좋은 문이다. 문의 뒤편에 있을 때는 잘 잠긴 문의 등짝을 늘 믿음직하게 여기지 않았는가. 나는 좀 전까지 원리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의 강직함에 분노했었다. 저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문에게 ‘내가 누군 줄 알고 가로막느냐?’며 패악을 부렸다. 우스운 일이다. 문은 어떤 고귀한 분이나 악한의 방문을 받았을 때도 지금처럼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 단 하나의 열쇠에게만 반응하도록 문을 길들여 놓은 것은 나였다. 열쇠가 올 때까지 다른 무엇에도 한눈팔지 않는 충직한 자세를 지켜보면서, 문의 미덕에 잠시 분개했던 나를 탓한다. 그런데, 저 문을 다스릴 열쇠는 대체 언제 도착하는가.

차가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임응식의 사진 ‘전쟁고아가’가 생각난다. 그 사진 속의 고아도 폐허의 어딘가에 지금의 나처럼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넝마에 맨발, 온몸에 때가 새카맣던 소년이었다. 다섯 살쯤 됐을까?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눈을 잔뜩 치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초리가 떠오른다. 난리 통에 혼자된 그 아이에게 사방이 온통 잠긴 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순간, 아이에게는 세계로 통하는 문이 닫혀버린다. 애초에 어머니는 모든 인간에게 문이었다. 어머니라는 문을 열고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내 배 가운데에도 붉고 기다란 문 하나가 있다. 임시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폐쇄된 문, 그 문을 열고 아이 둘이 세상에 나왔다. 출산의 순간이 아니라도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열린 문이다. 떠나온 곳을 향해서나, 돌아갈 곳을 향해서나.

어머니를 잃어버리면 생의 비밀의 문 하나가 영영 닫혀버린다. 고아 소년의 치뜬 눈이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문을 찾고 있었다. 세상 어느 편에선가 또 다른 문 하나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틈입을 허락하는 문. 자신을 그 영문 모를 잔혹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어딘가의 열린 문을.

이윽고, 복도 창으로 석양빛이 스며든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문들을 지나다니고 있는가. 어쩌면 그도 나처럼 문 하나를 열지 못해서 집으로 오는 시간이 이리 더뎌지고 있는 것인가. 그를 향한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걱정과 조바심이 섶을 타고들 듯 내 마음결에 옮겨붙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나는 금색으로 도장한 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생의 끝날까지 계속해서 닫힌 문들을 열고 지나갈 것이다. 어쩌면 생과 사의 접점을 통과할 때마저도.

죽음에 이른 뒤에라야 문은 소용없는 것이 될 터. 흙으로 봉분을 쌓아 올리거나, 석판을 덮은 묘지, 유택의 어디에도 문을 본 기억은 없다.

문 앞을 서성이다가 전화기를 꺼내 그를 다시 호출한다. 아니, 저 문의 열쇠를 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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