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의 인연 / 최재학

 

 

 

백담사에 가면 인연을 만난다 했다. 그래서인가 무심한 나그네도 백담사를 찾는 순간부터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졌다. 산사에 들어서면서 인연설을 설파한 만해선생을 만난다. 만해기념관도 만해당도 또 만해교육관과 매점까지도 ‘만해 적선당’이라는 당호로 만난다. 사찰 앞에는 매월당, 고은 등의 시비詩碑가 강물소리를 듣고 있다. 백담사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시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해의 시비 「나룻배와 행인」은 시인의 흉상과 나란히 서있다. 왜 「나룻배와 행인」이 그 곳에 서있는지, 그 자리에는 「님의 침묵」이 있어야 하는데… 무식한 나그네는 알 길이 없다.

나룻배도, 행인도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인가 보다. 혹여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나그네가 많은 시비들로 또 다른 번뇌를 얻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백담사에서는 특별한 인연도 만날 수 있다.

인간을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극락보전은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으며 좌측의 요사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머물던 곳>이라는 표찰이 붙어있다.

서너 평쯤 될까 말까 작은 방에는 그분이 입던 옷가지며 생활도구가 놓여있다. 지극히 서민적인 용품들이다. 혹시 영부인의 물품도 있는지 살폈으나 발견할 수가 없다. 아마 그분은 서민용은 사용하지 않았기에 진열하기에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마루에는 전 대통령이 이른 새벽에 장작을 패는 모습 등 백담사의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도 진열되었다. 감춰놓은 수천억을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검소한 모습이었는지 방문객들은 또다시 우롱당하는 느낌이라며 고개를 흔든다.

이윽고 시끄러운 인파가 저녁 공양을 알리면서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많던 구도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관객들의 틈을 비집고 먹이를 구하던 새끼 멧돼지도 보이지 않는다. 사찰 뒤편의 울창한 젓 나무숲이 긴 그림자를 감추니 호젓함이 더 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뿐이다. 그 물소리는 세상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소리이며 산사를 찾는 나그네에게 보는 것 이외에 덤으로 주는 보너스이며 또 다른 인연으로 들려온다.

어둠이 들면 산사는 정적만 남는 것으로 알았는데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있다. 종루에는 두 분 스님이 정신없이 사물을 두드리고, 보고 배운다는 사미승은 부동자세로 지켜본다.

일주문 밖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려고 사물들이 토해내는 부처님을 대신하는 소리이다. 물론 그 사물소리는 듣는 자 만의 생각이지만….

법고法鼓,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차례로 소리가 이어지면서 어둠이 찾아드는 산문 밖 내설악 깊숙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소가죽으로 만들었다는 큰 법고를 노련한 손동작으로 북의 중심과 퇴까지 골고루 두드린 다음 또 다른 스님이 이어서 범종을 친다. 종 줄을 잡아 세 번 흔들고 놓는다. 그러면 종은 자연스럽게 반동에 의하여 당좌(종 자리)를 정확하게 두드림을 반복한다.

종루에서의 예절은 대단하다. 오를 때도 내릴 때도 문루의 중앙을 향하여 합장한다. 또 각종 사물을 두드리기 전후에도 합장한다. 점차 범종각에서 울려나는 소리는 절정에 이른다. 그 소리는 자신을 맑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큰 울림이 되는 것이라 한다.

동행한 백 선생님은 사물四物소리까지 담아내려는 듯 손을 내젓는 스님을 못 본체 연신 플래시를 터트린다. 사물소리가 멈추자 이내 큰 사찰에는 어둠과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10여 채가 넘는 전각들도 침묵에 잠겼다. 쉬어가는 나그네 몇이 속세의 오욕을 떨쳐내려는지 절 앞의 강물에 발을 담근다.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이 산사를 거쳐 간 고승들의 숨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오는 듯싶어 귀를 기울인다.

잠시 뒤 땅거미가 깃든 어둠을 뚫고 수심고修心橋(백담사 정문 앞 해탈교)를 건너오는 자전거가 어렴풋이 시야에 든다. 한 달 넘게 사찰을 순례한다는 학생이다. 여름방학을 의미 있게 보낼 것을 구상하다가 자전거로 전국 곳곳의 사찰을 일주하고 있다 한다. 그도 또 그렇게 같은 방의 손님으로 인연을 쌓는 것이다.

스님들이 탁발하면서 고행하는 것은 구도자로서의 과정이다. 그러면서 무아無我를 얻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듯이 어쩌면 우리네도 부처님 말씀대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 올 때 못 본 꽃을.

 

「그 꽃」이라는 고은高銀의 시비가 눈길을 끈다. 아마도 내가 만난 시비 중 가장 간단한 시비였을 것이다. 만일 인연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해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올 때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인연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은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심경이 다름을 노래했겠지만)

내가 일행들과 봉정암까지 오를 수 있었다면 백담사의 그 인연들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백담사를 찾은 다른 관람객과 같이 그냥 스치고 말 것도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만난 것이 연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 억지로 맺어지려 해도 연은 허락지 않는다.

천 수백 년 전 자장이 들었을 수렴동 계곡의 물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 봉정암과 오세암의 불사를 위하여 길도 없는 길을 힘에 겨운 불구를 나르면서 목을 축이던 그 물에 퉁퉁 부은 발을 담그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이다.

한을 사르며 오세암을 오르던 매월당의 한숨 소리도 계곡을 건너고 나뭇가지를 돌아 바람 소리로 내게 속삭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달빛을 외면하던 만해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님의 침묵」을 얻은 그 길을 내가 다시 걷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인연이다.

산사는 연이 있는 옛 선지식들을 만나는 징검다리이다. 뿐만아니라 그분들의 자취가 더 큰 빛으로 번뇌에 쌓인 모든 인간을 깨우치러 연을 만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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