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 이론 / 조이섭

 

 

생명을 앞에 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지난해 세모에 8개월 난 금쪽같은 손자를 잃었다. 백세시대를 열었다는 현대 의학의 모든 것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 제 어미를 올려다보며 흘리는 손자의 애절한 눈물 한 방울을 그치게 하지 못했다.

생후 두 달을 갓 넘긴 둘째 손자가 39℃를 오르내리는 고열로 입원했다. 폐렴, 뇌수막염을 의심하고 온갖 검사를 받았다. 갓난아기의 척수를 뽑는 일이 어디 간단한 일이던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며느리는 눈물부터 쏟아냈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처치실 밖까지 새어 나오자 나는 귀를 막고 복도 끝까지 도망치고 말았다.

병원에서 원인을 모르겠다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큰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가와사키’라는 병을 의심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낫기는 시간문제려니 했으나, 치료를 시작하자 여러 가지 수치가 느닷없이 나빠졌다. 물퉁배기 갓난쟁이에게 이 약 저 약 마구 투입하니 작고 깨끗한 오장육부 어느 하나 온전하랴. 아이가 열에 들떠 밤새 보챘다. 그 어린 것도 엄마 품을 아는지, 지친 며느리 대신 안아보려고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었다.

사경을 헤매며 살려 달라고 눈짓하는 손자에게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인간은 떨어진 나뭇잎 하나 도로 붙이지 못한다더니, 바람 앞에 흔들리는 풀 한 포기보다 보잘것없었다.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는 아이 얼굴 한번 내려다보고, 명멸하는 계기판들의 LED 숫자가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을 졸이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병세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와중에서 점점 사위어 가는 불씨가 가여워 고개를 돌렸다.

다시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서울로 가기로 예약한 전날, 며느리가 간호 물품을 챙겼다. 출산 전 기대에 부풀어 출산준비물을 챙기던 모습과 달리, 축 처진 어깨 아래 야윈 몸피는 생기가 모두 빠져나간 풀주머니 같았다. 언제 다시 빨지 모르는 젖병과 큼직한 분유통을 챙기는데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아들이 지키고 있던 중환자실에서 온 전화였다. 손자는 끝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세상에 나와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전전하던 손자가 하늘로 올라간 후 6개월 동안 아들네 집 발걸음을 삼갔다. 가슴 항아리에 묻어둔 아픔과 슬픔은 어쭙잖은 위로 따위로 희석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로 삭여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받아보는 아들의 전화 목소리나 며느리가 보내는 문자의 행간에 스며있는 회색빛 휑함이 줄어들지 않았다.

아들에게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을 넣었다. 빗속을 뚫고 자동차로 두 시간여를 달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들을 곧바로 돌려세워 선술집으로 향했다. 활짝 열어젖힌 여닫이창을 통해 비에 젖은 바람이 밀려왔다. 건너편에 앉은 아들 얼굴이 초벌 구워낸 옹기처럼 까칠했다. 갓난쟁이를 묻은 가슴은 아직도 새카만 숯덩이 그대로인지, 아들의 눈에 그렁그렁 물기가 비치었다. 소주를 몇 잔 털어 넣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며 어깨를 들썩였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악몽보다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에 너무 짧았다.

아들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바뀌어 왁자한 선술집의 공기를 휘감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울음 사이사이 하소연이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뜻밖의 말을 꺼낸다. 아이가 잘못된 것이 제 탓이란다. 아이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친구 부친 상가에 조문하고, 운구를 도왔다고 한다. 생전 처음으로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당신 사주에 아들이 둘인데 왜 하나밖에 안 보이냐?’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란다. 사주에 들어 있던 생때같은 아들을 제 잘못으로 동티를 냈다면서 내 손을 움켜잡는다. 좋은 일 앞두고 궂은일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내내 가시처럼 목에 걸렸던가 보다.

아들은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고 결코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말과 아픔으로 빚은 눈물을 한바탕 쏟아낸다. “아버지, 요즘도 하루에 몇 번씩 그 녀석 생각이 난다. 몇 달 전부터 성당에 나간다. 일요일마다 새벽 미사에 참석한다. 그 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다. 나도 세례를 받을 거다.” 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세례를 받았던 손자와 영적으로나마 끈을 이어보려는 아들의 노심(勞心)과 초사(焦思)가 눈물겹다.

아들은 가장의 무게를 처음으로 내려놓고 마음껏 오열한다. 아버지 가슴도 미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번도 털어놓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굵어진 빗줄기가 울음소리를 집어삼키는 동안, 나는 건너편으로 가서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부모는 새싹이 뿌리를 내리면 키워내는 토양일 뿐, 하늘이 내리는 햇살을 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먼저 간 자식의 목소리는 저승길까지 쫓아온다더니 아직도 귀 막고 눈 감고 지내는 아들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는 아들 가슴에 타투처럼 남아있을 참척(慘慽)의 아픔을 바늘 한 땀조차 지우지 못한다. 기껏해야 허공에 흩어지면 그만일 이 말 한마디 밖에 해 줄 게 없다. 손자가 떠난 여섯 달 전 그날 밤에도 힘없이 내뱉었던 바로 그 말…….

“아들, 그래도 우리 힘내자.”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흐느끼며 비틀거리는 아들을 부축한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제 엄마가 마련해 놓은 자리에 철퍼덕 쓰러져 거친 숨을 내쉰다. 뒤척이느라 잠 못 드는 아들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진다. 이부자리를 여미고 난 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쓸모없는 모놀로그를 뱉어낸다.

 

아들아, 나도 너처럼 가슴에 묻어 놓은 참척의 아픔이 있다. 내 첫 딸, 너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너의 누나도 태어난 지 반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다. 깜깜한 밤에 강보에 싸인 아이의 주검을 안고 고향 집에 들어서니, 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식어버린 아이를 받아 앞장서서 뒷동산으로 올라가셨지. 낯설고 차가운 땅속에 아이를 묻고 난 할아버지는 울부짖는 나를 등 뒤에 두고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만 깊숙이 들이마셨더랬다.

인형 같던 딸을 언 땅에 묻고 와서, 그 밤 내내 골방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다 말다 자다 깨다 했다. 동살이 잡히기도 전에 사립문을 나서는 내 어깨 위에 할아버지 말씀이 새벽안개보다 무겁게 얹히더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데이.”

네 할아버지의 심정을 이제야 헤아리겠다. 손자 잃은 슬픔에 더하여 아들의 울부짖음까지 포개어 바라봐야 하는 마음 말이야.

할아버지와 내가 이미 겪었던 아픔을 또 다른 시공간에서 너와 내가 다시 치르고 있구나. 그러나 그 아이들이 해바라기보다 환한 웃음과 머루알처럼 까만 눈동자만 우리 가슴 깊이 새겨놓고 훌쩍 떠난 까닭이 분명히 있을 거라 믿는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리가 만나 ‘참 많이 사랑했단다. 너희가 흘리고 간 눈물방울은 우리 가슴 속에 알알이 살아 빛나고 있었단다.’라고 말해 주자꾸나.

 

평행 이론처럼, 똑같은 참척의 아픔을 새기고 사는 아들의 안색이 차차 제 빛으로 돌아온다. 마치 나의 속울음을 알아듣기나 한 듯이 고른 숨을 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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