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맞은 화단 / 김태길

 

 

마루 끝에 걸터앉아 볕을 쪼인다. 뜰의 손바닥만 한 화단이 된서리나 겪은 듯이 초라하다. 칸나 두 폭만이 아직도 싱싱한 잎을 지니고 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전멸 상태에 있다. 떡잎 진 옥잠화, 흔적만 남은 채송화, 패잔병처럼 축 늘어진 나팔꽃 덤불,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쓸쓸한 풍경이다.

만 삼 년 만에 돌아온 서울 집에 새봄이 왔을 때는 희망에 가까운 기쁨이 있었다. 그전 꽃밭 자리에 다시 조촐한 화단을 꾸미자는 의견에 온 집안은 유치원처럼 환성을 올렸던 것이다.

어떠한 화단을 만들 것인가. 처음에는 굉장한 이상론이 압도했다. 변두리는 벽돌로 쌓아 올리는 것이 좋다. 씨를 뿌리느니 보다도 진달래, 라일락 같은 꽃나무를 심는 것이 좋다. 처마 끝으로는 등나무를 올리는 것이 좋겠으며, 백합, 글라디올러스 같은 구근(球根)도 약간 필요하다. 그리고 또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그것을 죄다 심자면 삼층 사층으로 심어도 밭이 모자랄 정도로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실천 단계에 들어서니 이런 일에 목돈을 들일 형편은 못 되었다. 변두리는 벽돌 대신 집구석에 굴러다니던 송판 쪽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내년 봄으로 미루었다. 상점에 알아보니 구근도 무척 비싸다. 손바닥만 하다 해도, 모두 고급 구근으로 채우자면 월급 한 달 치쯤 무난히 들겠다. 몇 가지로 여남은 뿌리만 사고, 나머지는 출아보증이라고 설명이 붙은 종자로 대용할 수밖에 길이 없다.

제법 다리를 걷어붙이고 작업에 착수했으나, 그것도 생각하기보다는 힘이 든다. 첫째로 연장이 없다. 일꾼도 처음에는 나도 나도 하더니 실제 일이 시작되고 보니, 이 사정 저 사정이 있어서 결국 나 혼자 하다시피 되었다.

서투른 솜씨라 발아 성적은 매우 나빴다. 작년에 집수리할 때 일꾼들이 양회 섞인 구벽토(舊璧土)를 퍼부어서 토질이 나빠진 것인지 난 것조차 발육이 좋지 못하다. 뜨물이 낀다. 게다가 올해 신문까지 떠들썩한 큰 쥐 작은 쥐들이 크는 놈을 몽땅몽땅 잘라먹었다. 씨앗 봉지의 그림과 설명은 그럴듯하더니 실물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많았다.

이리하여 꽃 농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집안에 윤기가 돌게 하려던 화려한 꿈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도 한여름에는 하나씩 둘씩 꽃송이가 피었다. 그것들이 약간이나마 화제가 되었다. 이제 그나마 모두 시들어 버리고 칸나만이 홀로 쓸쓸히 밭을 지킨다.

가을바람에 초라하게 떠는 화단을 바라보고 실패한 꽃 농사의 기록을 회상하노라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실패한 나의 반생이다.

이십 전의 꿈은 나도 남에게 밑지지 않았다. 화단 계획보다도 더 화려한 계획이 새벽마다 잠자리에 수를 놓았다. 나는 높은 지위를 가질 사람이었다. 지혜와 덕은 일세의 모범이 될 사람이었으며, 가재(家財)로 말하면 거부는 못 되어도, 피아노나 자가용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것이었다. 나의 행복은 이상적인 가정을 중심으로 실현될 것이었다. 나의 아내는 교양 있고 아름다우며, 나의 자녀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다. 그리고 또 그리고….

이러한 행복이 운명에 의하여 저절로 굴러 오리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나의 지혜와 의지와 덕의 힘으로 이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근 이십 년이 흘렀다. 나는 현재 초라한 학교 선생이다. 그나마 우리나라 학계의 수준이 형편없고 우리 사회에 인재가 귀한 덕택으로 겨우 얻어걸린 직장이다. 나의 가정은 오직 평범하다. 살림의 군색은 밥 짓기에 골몰한 아내의 이마 위에 심각하고, 십 환만 달라고 보채는 어린 것은 오늘도 코밑이 지지하다. 거미줄 낀 대청에는 응접세트 대신 기저귀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일세의 목탁이 되기로 마련이던 나의 인격은 비굴한 졸장부로서 판에 박혔다.

그러나 나의 연령은 아직 늦가을에 달하지는 않았다. 인간 일생을 칠십으로 잡는다면 겨우 반밖에 안 산 셈이다. 실패한 꽃 농사에도 한 송이 두 송이 그래도 볼 만한 꽃이 피던 한여름에 비교할 시절이리라. 앞으로 다시 이십 년! 그때는 이 초라한 교편생활을 그리운 황금시대로 회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갑자기 거울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있다.

칸나 잎을 흔들던 쌀쌀한 바람이 선뜻 뺨을 스친다. 나는 악몽에서나 깬 듯이 벌떡 일어나 서재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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