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충만함을 찾아 / 임미리

 

 

“무소유 길”이라고 쓴 이정표가 저기 보인다. 저 길 끝쯤에 불일암이 있다는 의미다. 언제부턴가 한번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제야 오게 되었다. 너무 늦게 왔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암자를 찾게 되어 다행이라는 혼자만의 쓸쓸한 위로를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으면서 수없이 마음속으로 오고 싶었던 곳이다. 저 멀리 분홍빛 진달래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 주위가 환하다. 무소유 길은 혼자여도 둘이여도 그저 조용히 걷고 싶은 그런 아늑함이 느껴진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양쪽으로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사시사철 푸른 길이 나온다. 바람 따라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길을 걸어올라 불일암에 오르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기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호젓한 길을 돌아서니 저기 입구가 보인다. 문이 열려 있다. 문 앞에 쓰인 묵언이란 단어가 묵직하게 마음을 누른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조금 돌아서니 불일암이라고 쓰인 암자가 보인다. 어느 절처럼 웅장하지 않고 채색도 되어 있지 않는 작은 암자다. 佛日庵이란 한자어가 씌어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을 이곳은 정갈한 느낌이 들고 묵언이란 단어와 잘 어울린다.

암자의 뜰 앞에는 생전에 가장 아꼈다는 후박나무가 있다. 이제는 스님과 하나 된 후박나무도 묵언수행 중이라 한마디 말이 없다. 빗자루로 쓸어 놓은 것처럼 정갈한 마당으로 올라서니 생전의 모습처럼 웃고 계시는 법정스님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 아래에 묵언이라고 새긴 글씨가 조그마한 의자 위에 걸쳐져 있다. 의자 위에는 “책갈피는 불일암 참배 기념으로 한 장만 가져가세요.”라고 쓰인 문구가 보인다. 스님이 땔감으로 쓰는 장작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의자다. 제멋대로 소박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 또한 암자와 잘 어울려 정겹기까지 하다.

암자의 창문 앞에 놓인 나무 디딤돌 위에는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어딘가로 곧 나설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있다. 떠나버린 주인을 기다리는 신발 같기도 하다. 고무신 위로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작은 나뭇잎이 고요하게 묵언 중이다. 스님과 살았던 이곳의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스님처럼 수행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텅 빈 것 같은데 충만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수돗가 옆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수선화가 있다. 몇 송이 꽃을 피워 올린 수선화 화분이 앙증맞게 놓여있다. 수선화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정호승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중얼거리다 문득 스님이라면 속세의 인간들에게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어 내라고 조언했을지 궁금해진다. 생전에 “수선화에게”란 시를 읽었다면 스님은 무슨 생각을 얻으셨을까.

나는 수선화 옆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에 묵상하듯 앉는다. 인적 없는 이곳이 적막해서 좋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좋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서 오고 가는 중생들을 말없이 맞이해주는 이곳. 스님은 가서 오지 않지만, 지금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어 아늑함.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의 정겨움. 처마 끝에서 한 번쯤 찾아주어 반갑다고 심심하지 않게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 고즈넉한 봄날이다.

조금 더 앉아 있으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오늘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마음이 숙연해진다. 굳이 “무소유"를 논하지 않아도 이곳이라면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料布) 여섯 장,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라고 쓴 『간디 어록』을 읽다가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서두를 되뇌어 본다.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던 스님이셨기에 스님은 이곳에 없지만 스님의 유언처럼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스님은 홀로 이곳에 계신다. 오고 가는 행인들의 쓸쓸함도 하소연도 모두 다 알아듣겠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가볍게 살라고 묵언으로 한 말씀 주시는 것 같다. 처마 끝 풍경이 도반인 듯, 한마디 거들어 주려는 듯 오래 울려 퍼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으며 돌아오는 길, 무슨 일을 행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무소유 길을 걸어올라 불일암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라고 하는 서두를 참 오래 되뇌었는데 숙연해졌던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속세로 들어서는 길은 비가 내리고 꽃샘바람이 세차다. 이 바람이 잠들고 나면 고요한 봄밤이 올 것이다. 여우 빛 나뭇가지도 연초록으로 찬란히 피어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오늘은 좀 쓸쓸해도 텅 빈 충만함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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