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방정식을 도출하다 / 전성옥

 

 

철학을 방해하는 것은 삼겹살과 알코올이다. 놀라운 발견이다. E=mc² 혹은 E=hv에 필적하는 원리를 탐구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이론이 모든 물리법칙보다 우선되는 가치를 지닌 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특수상대성이론이나 광자의 에너지 값은 일상을 살아가는데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적어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삼겹살과 알코올은 은밀한 접근력으로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파괴력도 가공할 만하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방정식이고 주목해야 할 이론이다.

모두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심오하게 생각하여 한 마디 하고, 거듭 되새겨보고 두 마디를 할 필요는 없다. 말마다 미적가치를 담아 낼 필요는 없고, 단어마다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른 것이 인간의 비극이긴 하지만 말이다. 허나 어찌되었던, 말을 함에 있어 그 말이 상대에게 날을 겨누거나 나의 격을 베어내는 몹쓸 것으로 용도변경 되는 그런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 당연하다. 지극히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하여, 나 역시 이 보편에 기꺼이 합류한다. 더 나아가 이는 내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고 철학이기도 하다. 그런데, 때때로 나의 가치는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고 나의 철학은 수시로 박살이 난다.

 

오늘, 적당히 철학을 박살낼 각오를 한다. 낙동강 끝자락의 강변마을, 긴 강이 바다 진입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하고, 땅 밑을 기어 다니던 열차가 한 땀 식히려 지상으로 머리는 내미는 곳. 깊은 숨을 내 쉬는 열차의 옆구리를 열고 하나가 내려선다. 저만치서 손을 흔드는 둘과 셋, 곧이어 도착하는 넷. 서로를 둘러보는 하나, 둘, 셋, 넷의 얼굴, 은밀히 건네는 웃음들. 모두들 차를 두고 온 걸 보니 오늘 저녁 다들 어지간히 철학을 부셔먹을 작정들인가 보다.

 

늦여름, 저녁 어스름이 빗발을 덮고 있다. 춤추는 비,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비의 춤. 막힘없는 벌판이라 비의 춤은 거침이 없다. 일사불란한 그들의 군무, 우루루 왼쪽으로 몰려갔다가 쏴아아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비의 춤 비의 포효는 어둠의 포디움을 지배한다. 세상 모든 것은 비의 순한 백성이 된다. 두드리고 맞고, 씻어 내리고 씻김 받는다. 지배자와 백성의 교감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동자들. 긴장한다. 서두른다. 우리도 우리의 의식을 치러야 해, 어서 우리의 포디움으로.

자드락비가 몰아치는 강둑. 사람의 집 처마를 이어내어 강물의 끝자락에 닿는다. 기둥뿐인 벽, 들숨날숨으로 펄럭이는 천정. 하나, 둘, 셋, 넷이 그 아래 마주 앉는다. 우리의 인연이 십 수 년이라며 마알간 잔을 챙그랑 부딪는다. 늦은 나이에 얻은 소중한 벗이 아니냐며 마알간 눈빛을 사르락 부딪는다. 연기, 달콤한 연기가 젖은 천정을 축축하게 빠져 나간다. 없는 벽을 뚫고 빼꼭하게 열을 서서 들여다보는 빗발들, 나무기둥 옆 물웅덩이에 동당 동당 빠지는 맑은 그들. 착하기도 해라, 내가 언제 세상의 지배자였냐며 작은 물웅덩이 속으로 불평 없이 녹아든다.

하나가 향기롭게 고기를 굽는다. 향연이다. 둘이 맑간 작은 잔에 마알간 무엇을 찰랑찰랑 붓는다. 향유다. 셋이 여기는 신전이니 말하라고 한다. 무엇이라도 괜찮으니 말을 하라고 한다. 그냥 두면 마음의 둑이 터질 거라 한다. 넷은 심히 위로해 주겠다고 한다.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는 빗소리가 자욱하니 아무도 들을 수 있는 이가 없다고 한다. 더욱이 강물까지 저리 세차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한다. 신전으로 날아드는 바람, 젖은 바람은 궁금해 궁금해… 목덜미를 더듬는다. 연못에 몸을 담근 수련도 말해 줘 말해 줘, 상기된 얼굴로 바라본다. 넘실 몸을 뒤채는 강물, 나는 듣지 않을게, 들리지만… 듣고 싶지만 듣지 않을게.

아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액체를 입 속에 쏟아들 붓는다. 이제 철학 같은 건 상관없다. 넷은 씹기 시작한다. 두 종류의 고기를 씹는다. 불에 익는 고기를 씹어 명치 끝 까지 채워 넣는다. 동시에 말言에 익는 고기를 씹는다. 삼켜도 배부르지 않는 그것을 뜯어먹고 또 뜯어먹는다. 남의 옆구리를 흠씬 뜯어먹고 제 가슴을 박박 파먹는다. 아수라들이다. 배고픔에 무엇이든 주워 먹고 제 몸까지 뜯어먹고, 기어이는 제 머리를 짓찧어 흘러나온 뇌수까지 먹어치우는 그 아수라들이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 돌아보니 옆에도 아수라가 앉아있다. 컵에 담긴 저것은 그의 뇌수가 분명하고 씹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살이 틀림없다. 살육이다. 말은 날카로운 손톱이 되어 동서사방을 치고 나른다.

맞은편의 두 아수라는 핏빛 얼굴이다. 그러나 말리지 말라 한다. 오래 굶었으니 제 시장기를 탓하지 말라한다. 언제 아수라가 남을 탓할 겨를이 있던가. 온 세상을 다 걷어 먹고, 모든 사람을 다 뜯어 먹는다. 피와 기름에 미끈거리는 손. 비린내 나는 입 그리고 입들.

지친다. 연옥을 달구던 숯도 까맣게 지친다. 정수리까지 차올랐던 시장기가 가라앉는다. 광대뼈 아래로, 쇄골 아래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다. 설핏 스미는 한기, 어지러운 잔해들. 쿵~! 가슴에서 징이 울린다. 이를 어쩌나, 못 본 체 하자. 무슨 일이 있었더냐, 누가 말이라도 한마디 했던가. 우리가 누구의 등짝에 손톱자국 하나라도 냈던가 말이다. 불에 익은 뼈다귀와 말에 뜯어 먹힌 살덩이들이 나뒹구는 탁자를 넷은 애써 외면한다. 세상에, 놀란 수련은 그만 입을 닫는다. 나는 너희와 동사한 적 없노라, 강물은 무거운 몸으로 어둡고 길게 돌아눕는다. 들은 말을 옆구리에 감춘 바람은 빗발 사이 저만치로 사라지고 있다.

일어선다. 태깔부리는 직장동료의 등짝을 파먹던 하나가 일어선다. 세상을 난도질하던 둘과 된장찌개에 호박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종일 타박하는 남편을 뜯고 또 뜯던 셋이 일어선다. 제 마음을 박박 파먹은 넷도 일어선다. 휘청 인다. 뇌수를 모두 먹어 버린 탓이다. 비틀댄다. 가슴팍을 뜯어 먹어 균형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눈, 연옥 불을 바라보느라 붉게 익어버린 그들의 눈에 어둡게 찍히는 비바람 자국.

밤길을 걷는다. 자드락비는 여전히 세상을 두들긴다. 아무도 듣는 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들어버린 비는 지붕마다 떨어지고 사람의 우산마다 떨어진다. 비는, 검은 지네처럼 땅 위의 모든 곳을 기어 다닌다. 여기저기 노크하며 사람을 찾는다. 누군가 검은 지네가 속삭이는 은밀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이는 없으려나. 그 노크소리에 문을, 귀를 열어준 이는 없으려나. 어쩌나, 사방을 둘러… 본다.

제일 먼저 손드는 이, 마음이다. 아군인줄 알았던 내 마음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손을 든다. 다 들었노라며, 하나 남김없이 모두 기억하노라며. 붙들고 애원한다. 너를 어이하리, 마음 너를 어이하리. 마음아, 사실은 고기가 익는 향기에 환각 당하였던 거란다. 익숙하지 않은 향유에 실언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겨우 연례행사 아니더냐. 늦도록 사정하고 설득한다. 아쉬울 것 없는 마음은 드살스레 굴며 삐딱하게 돌아앉는다.

이제 아수라의 패기는 간 곳이 없다. 가슴을 친다. 우둔한 비의 신민이 되어 등짝을 후려치는 비를 묵묵히 맞고 말 것을, 빗방울처럼 그만 녹아들 것을. 작은 웅덩이든 흙탕물이든 그만 녹아들고 말 것을. 애초에 그 신전에 발을 들이밀지 말 것을, 말 것을.

젖은 길을 간다. 널부러진 비를 밟는다. 지네처럼 기어가는 비를 하나하나 밟아 뭉개며 걷는다. 구두 아래, 비가 부서지는 소리 찰박찰박…. 그리고 그 소리 아래에서 또 다른 무엇의 가느다란 외침이… 가느다랗게 들린다. 발밑을 내려다본다. 깨어진 철학의 부스러기들, 소복하다. 깨어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깨어진 입으로 항명을 한다. ‘이 신전이 아니면, 어디에서 인간의 탈을 벗어 볼 것인가. 이 무거운 인간의 탈을. 아수라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뜯어 낼 것인가, 짓누르는 뇌수와 조여 오는 가슴을.’

나는 침잠한다. 키리에 엘레이숀, 키리에 엘레이숀…, 나의 벗, 아수라들이여 당신들은 평안한가.

<에세이문학 201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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