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지키는 파르테논 / 김나현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겨울 볕이 따스하다. 파르테논신전 앞에서 뻐근하고 벅찬 감동에 젖는다. 여행 일정에 아크로폴리스와 메테오라가 없었더라면 유럽 여행에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돌아올 때 코로나19 상황은 차츰 대두되고 있었다. 이 여행을 끝으로 여행길은 막혔다.

곤혹스럽게도 여행 시작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손자를 돌보느라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가는 11시간 25분여 비행 동안 온몸은 뜨겁게 쑤셨다. 불 꺼진 비행기 삼인 좌석 중간에서 혼자 몸부림쳤다. 약을 먹었지만 치솟은 몸살 기운으로 지옥인가 싶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아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플 때는 위로와 인사치레조차 겉돌아 차라리 짐 하나라도 들어주는 편이 도움 된다는 것을. 겪는 당사자만 외로운 섬이 된다는 사실을.

열흘간의 여행을 준비하여 장 그르니에 산문 선집 『섬』을 챙겼다. 두껍지 않고 읽으려던 책이라 일찌감치 여행 가방에 챙겨 넣었다. 때맞춰 들이닥친 몸살로 책 제목처럼 섬에 갇혔던 여행.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기침이 돌아오는 날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기였으면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꾸던 아크로폴리스에서 몸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언덕에서 언제 또 아테네 공기를 들이마시겠는가. 심신이 처지더라도 찬찬히 여행다운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아파도 아플 새가 없다. 아플 수도 없다. 일정에 맞춰 다니려니 약을 먹어야 하고, 약을 먹기 위해 입에 맞지 않은 음식도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 이럴 때 여행은 고난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 출생 뉴에이지 연주자 야니Yanni의 아크로폴리스공연은 꽤 유명하다. 아크로폴리스공연을 본 후 야니의 찐팬이 되었다. 그가 현대백화점40주년 기념콘서트로 서울에 올 때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스에 와서 신전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음악당부터 찾은 이유다. 더구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1호 파르테논신전이라는 걸작도 있다. 이런 신전을 가진 국민이 신을 대하는 자세는 어떨까. 유전자부터 다를 것 같다. 이곳에서 공연한 야니도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을 정의하라면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지금 그곳 파르테논신전 앞에 있다.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두 시간을 합해 무려 열세 시간 하늘을 날아온 시간이 값지다. 몸살로 파리했던 세포가 모조리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파르테논과 에레크테이온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폐허나 다름없다. 돌무더기 널린 아테네 언덕에 있음을 실감하려고 자꾸 정신을 차린다.

사진이고 뭐고 그만두고 유럽 여행자처럼 너른 바위에 앉았다. 세게 사람들이 이 언덕에 모여들고 그들은 느리게 움직인다. 여행자를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일부다. 저 아래 아테네 시가지에 책에서 보던 제우스신전 기둥이 우뚝 솟아있다. 언덕 아래는 디오니소스극장이다 눈에 드는 것마다 역사책 한 페이지다. 도처에 신들을 모신 흔적이 남아있는 아테네는 통째로 유적이다.

이천 년이 되지 않으면 돌멩이로도 치지 않는다는 이곳. 신전의 배흘림기둥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기둥에 깃든 아득한 시간을 쓰다듬고 싶은데 접근할 수조차 없다. 울타리를 쳐놓은 파르테논은 복원공사 중이다.

신전에서 교회로, 사원으로, 급기야 터키인의 화약고로도 사용되었던 파르테논신전. 파란의 역사를 겪은 위대한 신전이 여행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내 조상의 조상, 그 조상의 조상, 그 윗대 조상을 만난 기분이 이럴까. 묵은 것이 주는 느낌은 묵직하고 편안하다. 오히려 오랜 것이 나를 쓰다듬는 느낌이다. 신전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 볕이 사선으로 닿지 따뜻한 황금색으로 변한 폐허는 걸작이다. 이 걸작을 뇌리에 담아두려고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여신을 기리고자 건축했다니 2,500년 전 흔적이다.

언덕을 내려오다 디오니소스극장 터 대리석 좌석에 앉았다. 고대연극이 열렸던 바로 그 자리, ‘OYP OTPO…’라는 어느 귀족 이름이 새겨진 지정석이다. 이 자리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스치는 바람 한 올도 예사롭지 않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음악당에서, 파르테논신전에서, 디오니소스극장에서, 그곳에 있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섬』은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하며 그때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고. 또 살아가며 통과해야 하는 엄청난 고독 속에는 어떤 각별한 장소와 순간이 있다고. 아크로폴리스도 내 고독 속 각별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돌아와 열흘쯤은 더 끌었던 여행 후유증도 추억으로 들어앉았다. 밥때마다 먹었던 몸살약, 옷이 젖도록 흘린 식은땀과 입에 맞지 않은 음식, 짐 싸던 일, 달고 산 기침까지도…, 다 지난 일이다. 고통스러운 여행일지라도 여행한 기억은 고통스럽지 않다. 지나고 나면 다 미소 머금게 하는 추억으로 남는다. 혼자만의 섬이 되더라도 여행은 할 만한 것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