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 라문숙 - 2021년 계간 시와 산문 신인문학상 에세이 당선작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얇은 코트 안으로 목을 집어넣으면서 혹시 근처에 들어갈 만한 카페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벌써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만 늦어도 미리 연락을 하곤 했던 평소와 달리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공원에도, 공원 옆길에도 사람들이 드물어 한적했다. 오랜만에 홀로인 기분이 얼마나 가벼운지 바람에 휘날리는 보자기라도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헐렁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거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공원 밖으로 나가는 대신 계속 서성이며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 고작이었다. 봄바람에 머릿속까지 흐트러져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른 잎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휘말려 올라가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문득 가까운 곳에서 낯선 소리가 조금 전부터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건 ‘말’이었다. 이방의 말.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정도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난처한 표정이 섞인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법 여러 번 말을 건넸는데도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는데 소년 역시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소년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고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 내게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가 내게 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내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걸 눈치챘는지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흉내를 냈다. 아, 사진! 그가 원하는 건 사진이었다. 나는 소년이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구름은 점점 낮게 내려앉고 바람도 거세졌지만 나는 소년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던 이들이 흘깃거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엉거주춤 서 있는 소년의 사진 서너 장을 찍은 후 핸드폰을 돌려주고 큰 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예의 그 낯선 언어가 다시 들려왔다. 나를 쫓아온 소년은 손가락으로 핸드폰 속에 찍힌 사진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했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는지 의심스러운 표정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지러웠다. 사진을 다시 찍어달라는 건가 싶어서 손가락으로 그의 핸드폰을 가리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신 아이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잡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소년의 손짓에 따라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서고 다시 다가가며 사진을 찍었고 나란히 서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소년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진건 자신의 모습이 어깨 바로 아래까지 찍힌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증명사진이 필요한 거야?”

사진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을 때 소년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나는 다시 소년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화면 속에서 소년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알게 되자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지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사진을 찍으면 소년이 들여다보고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한 번 더!를 외치는 일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함께 사진을 보던 내가 한 번 더!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한 사진들은 소년의 성에 차지 않았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 사진들은 내가 보기에 뭔가 부족한 듯 보였다.

그때쯤 우리는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연스레 묻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함께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소년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머리를 부풀리고 빗어내리고 헝클어뜨렸다. 스웨터 안에 입은 셔츠의 깃을 안으로 넣기도, 겉으로 드러내 보기도 하면서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지었다. 휴대전화 화면 속의 소년은 비누냄새가 날만큼 청결하고 싱그러웠으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하고는 차이가 있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웃었다가 진지해졌다가 화가 난 것처럼 부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자신의 얼굴이 찍힌 수십 장의 사진을 넘겨보는 소년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이었다. 소년이 마침내 공원을 떠났을 때 나는 어딘가 다른 세상이라도 다녀온 듯 생경한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그동안 바람은 잦아들었고 하늘도 조금 밝아져 있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 서점에 들렸고 카페에 앉아 방금 목적지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기대에 차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가슴 속까지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조금 쓸쓸하기도 했지만 조용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날 저녁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공원에서의 약속에 대해 물었다. 친구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무슨 말이야? 우리가 만나기로 한 건 다음 주잖아!”

공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낮에 있었던 일이건만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했다. 그날 오후의 가뿐했던 기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어긋나게 기억하고 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와 나는 누구보다 말이 통하고, 아니 굳이 말을 하지 않고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마음과 말 중 무엇이 문제일까? 말이 가능하지 못할 때 마음이 앞으로 나온다.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었던 나와 소년 사이에서 ‘말’이 장벽이 될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터다. 소년은 나를 이해시키려고, 나는 소년을 이해하려고 애썼으니까. 어긋난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사나운 봄바람에 맞서 홀로 텅빈 공원을 서성이다가 외계에서 온 듯한 소년의 사진을 찍으며 웃음을 터뜨렸던 중년여자는 ‘말’들이 길을 잃고 장마철 강물처럼 범람할 때마다 기억 속에서 조각배를 타고 내게로 건너온다.

“그 때, 기억 나?”

 

 

 

 

수상소감

시작하는 자리에 다시 설 수 있어

 

지난겨울은 멍하니 앉아서 보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숲으로 난 작은 창을 자주 바라보았습니다. 앉은 자리에서는 곧게 뻗은 나무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침대에 누우면 나무 우듬지에 내려앉은 햇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언제 묻든, 어떻게 시작하든 질문의 끝은 읽기와 쓰기에 닿았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될 거라고 나무들이 알려준 것도 같습니다.

물론 이미 출간한 책들이 있습니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던 글들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글을 만지면서 뜨거웠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자신은 없었습니다. 쓰는 사람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출간과 동시에 사라져서 나는 금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끝내지 못한 글들이 쌓여갈수록 의심도 커졌습니다. 여전히 앉아만 있던 어느 날 문득 일어나 원고를 들고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부끄러웠습니다. 믿음을 주지 못했던 사람도, 믿지 못했던 사람도 모두 자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계속 써도 되겠다는 허락을 받은 듯해서 안도하고, 시작하는 자리에 다시 설 수 있어 기쁩니다.

글쓰기는 쉬이 넘어가지 않는 날들을 버티고, 점점 거세지는 소란을 잠재우려는 시도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고집하는 이들의 마음을 닮겠습니다. 작은 것들, 찰나, 새벽빛, 산들바람, 새싹, 옛이야기, 꽃봉오리, 웃음소리, 마른 잎, 붉은 열매, 속삭임 같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보이는 것들 너머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열심히 읽어주었던 분들, 독자들, 이런저런 제안들로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나누어 준 이들, 글쓰기 선생님 같았던 편집자들께 감사합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작은 심부름도 시키지 않았던 엄마, 내 작은 세계의 파수꾼인 남편과 아이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너그럽게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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