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이의 아픔/ 李正林


"지양 선생, 어떻게 지내시오?" 
밤늦게 걸려 오는 전화는 늘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그 전화는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늦게 만난 동창이라서 그런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예의를 잃지 않는다. 아니, 만학(晩學)으로 만난 사이가 되어서가 아니라, 원래 성품이 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새 학기부터 강의를 나가게 된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난 듯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목이 울컥 메이는 듯 짧게 말했다. 

"박 여사, 보름 전에 갔어!" 

나는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다니…. 그럼 기어이 갔단 말인가?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심성이 워낙 밝아 늘 목소리가 명랑하던 사람. 그의 얼굴이 얼른 눈앞으로 스쳐 갔다. 그러고는 이내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는 어찌 되나? 혼자 남은 사람에게 닥쳐올 그 외로움을 어찌 감당해 낼 까? 

고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이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상제를 위로하느라 상갓집에서는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호상(好喪)이라는 말로 슬픔을 희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 호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을까. 백 살에 떠나도 죽음은 산 자와는 영원한 이별인 것을. 

나는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이럴 때 "얼마나 애통하십니까?"라든지, "상사 말씀을 무엇이라 드려야 할지…" 하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도 괜찮을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그러나 그렇듯 무심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어쩌면 좋지? 괜찮다고 했지 않아요? 김 회장은 앞으로 어떻게 해?" 하고 조문(弔問)의 예와는 어긋나는 말만 늘어놓고 말았다. 

친구는 내 말에 잠깐 그간의 경위를 설명도 했지만, 더는 말하기 힘들었던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그가 그렇게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한다. 슬픔은 어느 누구의 위로로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전화기를 든 채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경에 접어드는 남자가 혼자 울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나 또한 측은한 생각에 가슴이 아파 왔다. 

혼자 남은 이의 아픔과 혼자 남겨 두고 가는 이의 아픔 중에서 어느 아픔이 더 클까. 떠나는 이가 아무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망인(亡人)은 이제 남겨진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슬픔과 아픔은 오로지 산 자의 몫이고, 그것은 생명 있는 자들이 겪어 내야 하는 괴로운 형벌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터득한 작은 진리 하나, '몸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는 한낱 움직이는 어떤 것일 뿐이고, 정말 같이 있다고 느끼는 그 마음은 몸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멀어질 수 없음을 느낍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생각이다. 이 글은 남편을 여읜 어느 아내가 눈물로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경기도 벽제에 있는 "추모의 집"은 이런 아픈 사연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몸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그것을 자신에게 거듭 다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거리는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먼 것은 먼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참으로 냉정한 인식의 눈뜸이다. 

아무리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는 이제 눈앞에 없다. 눈앞에 없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이 너무나 허전하여,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고인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그를 찾아보려 애쓴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이제 만남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분화구같이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던 아픔만을 폭발시켜 줄 뿐이다. 아직도 그의 손때가 묻어 있고 아직도 그의 체취가 가시지 않은 물건들을 대할 적마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듯 기억 속에서 솟구치는 아픔, 그 아픔 앞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다시금 사별(死別)의 허무함과 맞서야만 한다. 

내 친구도 아내가 남기고 간 그 숱한 흔적들 앞에서 많이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 흔적이 아픔이 아니라 반가움으로 여겨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끝없이 아파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아무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는 차차 그 아픔에 혼자 길들여져 가야 한다. 

떠난 이는 남겨진 사람이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아픔에서 오래도록 헤어나지 못하면 고인도 안타까워할 것 같고, 그 아픔을 잘 이겨내면 안심하고 이승을 떠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게 되면, 남겨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슬픔을 안으로 감추게 된다. 그것이 고인을 위하고 사랑하는 일일 것 같아서. 

지금은 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할 친구가 새롭게 고인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임을 알게 될 때, 그는 타인의 위로에도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부디 그때가 빨리 오기를 바랄 뿐, 내가 그를 위해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혼자 남은 이의 아픔이란, 결국 자기 손으로 잘라 내야 하는 상처의 거스러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2001).♥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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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정림(李正林) 

1965년 한국 외국어대학 불어과와 1985년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1974년 "수필 문예" 및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으로 등단한 수필가. 
1992년 현대수필문학상과 1999년 신곡문학상 본상을 수상. 한국일보 문화센터, 중앙문화센터, 마포 평생학습관, 롯데 일산점 MBC 문화센터 등에서 수필교실. 한양여대출강.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범우사), 『산길이 보이는 窓』(범우사) 『하얀진달래』(선우미디어) 『숨어 있는 나무』 (범우사) 등과 
평론집 『한국 수필평론』(범우사), 개정판『한국 수필평론』(범우사)
번역서 『어린 왕자』(생텍쥐페리) , 『인간의 대지』(생텍주페리) ,『여자의 일생』(모파상) 외 다수. ♥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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