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소리 / 허세욱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십 년 앞서 세상을 뜨셨다.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왜경의 참혹한 고문을 당하시고 그 길로 신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니, 그게 내게는 한으로 깔렸고, 할아버지 제삿날마다 오열하시는 아버님의 곡을 통해 내게는 한층 간절한 연모로 심화되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연모하는 할아버지를 대표했다. 그분이 조선의 마지막 시험에 등과한 만큼 그 깊은 한학이 내게 훈도를 주신 바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분의 근엄한 거동과는 달리 완연한 자애 때문이었다.

종조부께서는 노산의 재실에서 삭거하셨다. 우리 마을에서 오 리쯤 떨어진 산기슭이었는데, 거기는 노송 사이로 솔바람만 늘 여울질 뿐 다른 인가는 없었다. 심한 풍우가 아니면 조석으로 내려오셔서 진지를 드셨다. 그때마다 우리 집을 둘러보셨는데, 그 본댁이 우리 이웃에 있어서도 그랬지만 끔찍이 종가를 위하는 법통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 집 사랑채에 차린 서당 방에서 한문을 읽는 초립동이었다. 불행하게도 태평성대에 읽는 옛글이 아니라서 한문을 읽는 소리가 한유하고 낭랑할지라도 조심조심 천길 골짜기를 기어가는 불안과 긴장을 쫓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밤이 지루했다. 산에서는 산 손님이 내려왔고, 이들 빨치산과 우리 군경 사이에서 교전이 벌어지면 콩 볶듯 한 총소리에 한밤을 떨어야 했다.

그토록 전율했던 밤이 밝아지는 새벽, 나는 아버지와 선생님의 호령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글을 외어야 했다. 눈을 비비면서 어제의 글을 외는데, 그 복습이 끝날 무렵, 동녘 영창이 붕어 빛으로 물들면서 예의 직직거리는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지팡이 소릴 들을 때마다 사실은 마음이 다소곳 놓이는가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나의 글 읽는 소리가 작은할아버지께 들렸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 지팡이 소리로 간밤에 짓눌렸던 우리들 온 집안의 구석구석이 비로소 보호를 받고 구원을 누리는 느낌이었다.

그 지팡이는 우리 집 사랑 마당에서 일단 멈추더니만 다시 사라지곤 했다. 안채와 행랑을 두루두루 살피시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우리 집 사랑마루에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걸터앉으셨다.

“얘야…….”

어느새 아버님은 마루로 대령하셨고, 두 분은 무언가 말씀하시다가 다시 가냘프게 그 예장성이 들렸다. 당숙 집으로 건너가신 거다.

그 지팡이는 고작 가느다란 막대, 볼품없이 민둥민둥했지만, 그것이 백발노인에게 쥐어졌을 때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호적이나 차디찬 서릿발의 장검에 비유되었고, 그 기침은 흩날리는 작은 목청이었지만 한 마을의 장유나 시비를 가리는 법령에 상당했다. 온 골목이 왁자지껄 싸움판을 벌였다가도 노인의 기침 몇 번이면 멎었고, 도깨비들이 잔치를 연다는 물방앗간을 지날 때에도 마른기침이면 악귀를 쫓아낸다고 했다.

지팡이 소리나 기침 소리만도 아니었다. 사랑채 섬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 한 켤레만으로도 수다스런 아낙네들의 입을 막았고, 문턱이나 놋쇠 재떨이를 두들기는 장죽의 소리로도 웬만한 고부 싸움은 덜컥 멈추었고, 추야장 깊은 밤에 사랑방 미닫이를 새어 나오는 유유한 시조 한 가락에 온 마을이 평화로웠다.

지팡이 또한 근엄한 것만은 아니었다. 황혼의 객창에 들리는 지팡이 소리는 더러 초조하지만, 음산한 성황당을 넘어가는 깜깜한 지팡이는 차라리 또박거린다. 백로가 훨훨 나는 막막한 무논을 스쳐 가는 지팡이는 차라리 펄럭이는 옷고름이 되고, 백화만발한 꽃재를 뚫고 가는 지팡이는 말뚝이 된다.

하지만 나는 무너지는 나라, 기우는 가문을 짚고 선 종조부의 지팡이를 잊지 못한다. 그 육척 장신에 하얀 수염, 하얀 두루마기, 키를 재는 긴 지팡이에 기대어, 흐르는 시내를 굽어보고 먼 하늘 흰 구름을 응시하던 그 용태는 어느새 내 마음엔 비석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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